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강유원 / 2009-10-4 / 서평하영선 외(지음),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창비, 2009.[97889364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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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낸 책은 필자들의 실력을 한번에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욱이 10명의 필자 중 9명이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인 경우에는 일종의 개인차를 발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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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권력', '주권', '부국강병', '세력균형', '평화', '국민/인종/민족', '민주주의' '경제', '개인', '영웅' — 마지막 영웅을 제외하면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이다. 또한 이 개념들은 구한말을 전후하여 서구에서 도입되었고 일정한 변형을 거친 것들이다. 우리는 각각의 개념들이 도입되고 변형된 맥락과 그 내용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서구 개념의 형성, 도입과정, 도입된 이후의 수용과 변형과정, 그리고 현재의 용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정과 내용을 알아야만 하는가? 현실적인 쓸모는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개념들이 서구에서 '본래' 어떤 뜻이었건, 또 도입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했건, 이제 어느 정도 토착화되었으며, 그것에 어느 정도 합의하고 있으면 그만아닌가. 이 책도 이 물음에 대해서는 대단히 설득력있는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책머리에'의 "개념사 연구가 이렇게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면 한국의 사회과학은 영원히 사상누각의 위태로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은 추상적이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다. 하영선의 '변화하는 세계와 개념사'에 나오는 "무대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었던 근대한국은 기본 개념의 강대국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개념으로 변화를 재단하고 비현실적 미래를 꿈꾸는 비극을 맞이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뜬금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최소한 비극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개념사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념화의 21세기적 식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21세기의 변화를 어설프게 개념화하고 미래를 꾸려 나가려고 하면, 우리는 19세기적 21세기 난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첫걸음은 본격적인 한국의 개념사 연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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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사 연구 — 그냥 평이하게는 개념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난관 회피의 첫걸음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겠는데 우리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를 한번 생각해봄으로써 그 의의를 우선 짐작해보기로 하자.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정치는 도덕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을 거론할 때 전거로서 빈번하게 인용되는 <<논어>> 안연(顔淵)편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였다. 정치는 올바름이다. 당신이 올바름으로써 이끌면 감히 누가 올바르지 않겠는가(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 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1) 공자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형성된 도덕주의 정치관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조선의 전통을 무의식중에 체화하고 있는 한국의 인민들은 도덕적 올바름이 함축된 정치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국가로서의 한국은 이러한 정치개념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근대국가에 있어 정치개념을 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는 "한 정치적 조직체 내에서의 권력 배분 또는 여러 정치적 조직체들간의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행위"(<<직업으로서의 정치>>)이다. 이러한 개념에 걸맞게 행위하는 근대 국가의 정치가는 법에 합당한 수단을 통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는 이외의 것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처럼 "권력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행위"를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하곤 한다. 이러한 일종의 이중 잣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정치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대통령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이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공적 법인체의 성격을 띤 지배 조직"으로서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데 성공한 지배조직"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 국가의 최고 운영자로서 대통령은 법에 합당한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충족시키려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정치가는 종교가도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그의 과업은 인간 영혼의 구원에 있지 않다. 모든 정치적 행위에는 "악마적 힘"들이 개입되어 있고 정치의 과업은 "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 국가로서의 한국에서 도덕주의적 정치를 펴려하는 지도자는 사실상 무능한 지도자인 것이다.
"악마적 힘"들과 관계하는 근대 국가 정치가의 본성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지 못한채 이러한 착각이 계속된다면 착하고 도덕적인 인민들의 수난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 도덕주의적 지도자들의 어설픈 노고는 번번히 좌절될 것이거니와, 이는 결국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공멸의 지경으로 모두를 이끌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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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사 연구를 말한다면 반드시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을 떠올려야 한다.2)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 "개념사 연구는 단순한 개념의 역사적 지속과 변화를 다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개념 그 자체를 고정된 상태에 두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전망 속에서 현재를 개념화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개념 형성의 전반적 맥락을 따져 묻는다. 이때 개념사 연구는 사회사 연구와 긴밀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거니와, 이러한 상호연관을 코젤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사 학술용어는 언어로 축적되는 경험을 접근할 수 있게 하려면 개념사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개념사는 결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사라져버린 현실과 언어적 증거의 차이를 계속 보려면 사회사 결과에 의존해야 한다."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들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를 수행하려면 코젤렉의 방식에 따라 "개념의 변화를 특정 사회 내부의 구조적 변화와 관련하에서 추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들은 내부에서 생겨나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일단 외부에서 도입된 것들이므로 "서구라는 외부적 충격과 서구 문명 전파에 대한 대응의 형태로서… 수용과 변화과정에 촛점"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독일에서 생겨난 개념사 연구 방법 자체도 한국에서는 수용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에따라 필자들은 "개념형성사를 근대 서양 개념 도입사로 접근하려던 소박한 생각"을 접고 "전통 개념의 좌절사를 거쳐 전통과 근대개념의 복합으로 형성되는 새 개념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만 했거니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러한 숙제에 대한 답이라 하겠으며, 우리도 이 글들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제시된 개념들의 형성과정에 주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들이 이 숙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도 유념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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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수용과 변형 또는 외부의 충격과 그에 따른 내부의 대응일 것이나 거기에는 더욱 복잡한 사정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개념은 그 개념을 도입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없다면 도입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로 우리는 '주권'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를 전개했던 조선은 외부 국가와 근대적 의미의 '조약'을 체결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병자년인 1876년 일본과 맺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를 통해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관계가 형성되었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朝鮮國 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자주는 조선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개념이며, 일본이 이 개념을 삽입한 의도는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宗主權)을 배격하려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에 주권 개념의 도입과 사용은 청을 중심으로 한 사대와 조공의 전통 질서에서 조약과 국제법의 서구 근대 질서로의 이전을 의미하였고 이는 '세계관 충돌'의 형태"를 띠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외 관계의 규범과 규칙의 전파, 더 나아가 현실적 무력 충돌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1894년에서 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은 "상국(上國)의 체면상 속방(屬邦)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명분3) 아래 파병하였고, 일본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회답을 보내면서 군사를 출병시켰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서 청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의례 철폐를 선언하였는데, 이로써 청.일.조선 동아시아 삼국은 형식적으로 근대적 국가관계에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우선 시선을 끄는 것은 조선에 '자주'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이 대외관계를 규정할 때 사용했던 개념은 사대교린이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이러한 기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직면'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현실이 침입해 들어왔다고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조선은 대외 전략을 세우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여전히 사대교린의 방책에 얽매인채 사대의 대상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말 외교현장에서 발견하는 친청, 천러, 친미, 친일의 군상들은 매국의 신념에 복무한 이들이 아닌 사대의 전략을 충실히 따른 이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개념이 그러하고 그 개념에 충실했으니 그들의 행위와 그 결과를 비난할 수만도 없다. 개념없는 자들은 어떤 짓을 하는지만 잘 알아두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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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이래 한반도의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외교적 안목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앞서 '자주', '주권' 개념을 살펴보면서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그런데 근대 "서구의 외교란 국력의 일부이자 이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말하자면 서구의 외교란 단순히 친선과 교린의 차원을 넘어 전략적 구상과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전략적 행위의 총체였고, 따라서 전문적 행위와 연구영역이었다." 외교가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된 권력국가가 정치행위의 주체인 시대이다. 외교는 물론 법 역시 이러한 전문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서구의 법은… 국가 권력의 작동원리와 나아가서 국민의 삶의 모든 부분을 규정하는 강제규범이었고, 따라서 국가는 이제 인(仁)과 덕(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군자(君子)의 도(道)의 발현이 아니라 일정한 규범을 기준으로 하여 강제력을 발동하는 제도가 되었다."
서구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논의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동아시아적 정치, 법의 개념이 옳다해도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것을 타국에 대해서는 물론 자국 안에서도 자주적으로 관철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현실과 그에 걸맞는 개념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의 소수 선각 지식계층이 있기는 하였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 서적 등과 같은 인쇄매체를 통해 개념을 전파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정부의 정책입안이나 법령 공포 그리고 교육과정에서 학교 교과서의 배포 또는 대중 강연회, 대중집회, 학회의 개최" 등을 통해 더욱 진전된 전파를 시도하였다. 그러한 당시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박영효와 유길준의 글들을 분석해보면 "서구사상의 언어와 전통사상의 언어가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혼합된 채로 교차적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개화파의 독자적인 사고체계, 말하자면 동서양의 사상이 소화된 단일한 사고체계는 나타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그것의 원리가 전통에서 길어올린 것이건 새롭게 받아들인 서구 사상이건 개화파의 사고체계가 "소화"된 무엇인가를 낳아놓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어떠했을까? 다시 말해서 같은 개념이라해도 그것이 수용되는 장소(topos)에 따라 수용과 변용의 차이는 어떤 정도로 일어날까? 여기서 우리는 장인성이 분석한 '세력균형'의 개념을 예로 들어 이 상황을 검토하기로 하자. 그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세력균형' 개념은 권력을 지배력, 영향력, 강제력 등으로 파악하고 도덕과 권력을 분리하여 권력 자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4)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세력균형(또는 '균세(均勢)') 개념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무사들에게는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되어 "개체적 전투력과 생존의지에 충만한 만국투쟁적 질서"로 이해되었으며, 그에따라 "부국강병을 통해 주권을 확보하고 서양국가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개체적 주체적 생존의지"로 귀결되었다. 청에서는 세력균형이라는 말에서 '균형'이 강조되어 이해되었다. 청은 "서양국가(미국)를 끌어들여 러.일을 견제하는 동북아 세력균형 — '균세지국(均勢之局)' — 을 구상하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동원"하였거니와,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청이 여전히 '화이질서적 대국관(華夷秩序的 大國觀)'을 가지고 사태에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른 한편 조선에서 이 개념은 "대국과의 동맹이나 외교정책의 신중함(prudence)을 추구하는 전략관념"으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세력균형이 본래 서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아시아 국가 각각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도 알아야만 한다. 근대의 세력균형 개념은 동아시아에서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용이 일어나게 되지만 그 변용은 장소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수용.변용과정을 분석하려면 우리는 먼저 '관념(idea)'과 '개념(concept)'을 구별해야 한다. '관념'은 "개념을 생성하는, 혹은 그것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주관적인 생각들"이고, '개념'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확립된, 혹은 널리 양해되는 언어로 표현된 표상… 사물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객관화된 언어 혹은 논리적 실재"이다. 이 구별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세력균형 개념의 수용과 변용에서 알아보자. 서구 근대의 세력균형 개념은, 서구에서는 멀게는 30년전쟁 이후 국제질서를 틀지운 베스트팔렌조약 이래 형성된 서구인들의 관념 위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중세의 신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에따라 국제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국민국가 체제는 낯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무렵 그들은 300년 정도에 걸친 '근대화'를 마무리짓고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섰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는 세력균형이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되어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이 체제는 바로 일본이 가지고 있던 관념에 해당하거니와, 이는 일본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일본인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주관적 생각이었다. 반면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청과 조선에서는 그것에 근접한 관념들로써 서구의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수용된 개념은 관념에 의해 변용되며, 관념은 변용된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이 관념은 피수용자의 역사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니, 이 경험의 유무가 정확한 개념 수용의 핵심적 요인이라 하겠다.
이 점은 '민족/국민', '경제' 등의 개념수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민족 개념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강력한 힘을 얻게 된 것인데, 이것 역시 역사적 맥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민족'으로도 번역하는 nation은 본래 '근대국가의 인민, 즉 국민'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피를 나눈 동포'의 뜻은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개념이 도입된 대한제국 시기에는 '국민'으로만 이해되었으나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국민의 전제가 되는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전의 국민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민개념에 의거하던] 논자 다수는 [일본]제국에 의해 점령된 국민개념과의 결별을 꾀했다.5) 국민개념을 버린 논자들이 다시 주목한 것이 다름아닌 민족개념이었다… 국민개념의 제국주의 논리로의 변화가 민족개념으로의 급속한 집중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nation building'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국민(국가) 형성'이 아닌 '민족 형성'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다른 주요 개념은 '경제'이다. 이 개념은 서구에서도 전면적인 변화를 거쳤다. economy라는 말을 '가정'을 가리키는 희랍어 oikos와 '규범'을 가리키는 nomis가 결합된 것으로서 '집안일 관리'를 의미하였다. 그것이 '부. 성공'을 의미하고 국가의 관리를 받는 것, 재산, 교환과 분업의 체계를 의미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 과정에는 서구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의 심대한 변화가 수반되었다. 다시 말해서 서구에서도 경제는 본래 사회의 일부였으며, 그것이 근대 이후에야 별개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질서의 원천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가 국민경제를 구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명확한 국경 안에서 살림살이한다는 의미 혹은 그 안에서 경제 행위를 규율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명시적이고 의식적으로 부의 추구를 국가 주요 정책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근대국가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부국강병의 차원에서 경제를 매개로 근대국가를 이룬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농공상의 질서가 상존했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경제를, 그 번역어가 의미하듯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경세제민(經世濟民)'는, 일종의 정치윤리와 통치술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를 부의 체계적 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정치.경제, 즉 새로운 경제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제도적 기반을 요구하는 일의 성격을 띠게 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수반되는 정치적 과정"이었다.6) 21세기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경제'를 '돈벌이'의 의미로 이해한다. 가령 '경제 대통령'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어보면 '돈많이 벌게 해주는 대통령'이라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개념이 변용된 것 역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개입된 귀결일 것이다.
개념은 관념을 정리해주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들어낸다. 물론 개념이 없다해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건 아니나 어설프게 변용된 개념은 차라리 가지고 있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이르렀고 다른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된다해도 그것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개념이해자의 정치적 처지나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러한 이해와는 아주 무관한 언설이 펼쳐질 수도 있다.7) 개념이해와 삶의 영위는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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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근대한국의 문명개념 도입사"에서 필자는 유길준(1856-1914)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조선이 겪고 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2)청일전쟁 이후 급격하게 커진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3)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4)조선형 문명화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필자는 21세기가 "탈근대 복합국가들의 부국강병을 넘어선 복합목표를 새롭게 추구하는 신문명의 가능성을 맞이"하고 있다면서 "한반도는… 21세기 한반도형 문명화의 꿈을 새롭게 꾸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19세기 말의 실패를 거울삼아 21세기에는 뭔가 잘해보자는 말인듯한데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21세기를 어떤 문명 — 같은 뜻은 아니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도 해보자 — 모형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제프 일리의 <<The Left>>8) 서문의 두 문장을 떠올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 이 구절은 자로(子路)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면 더 명료해진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 몸을 올바르게 하면 정치를 함에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내 몸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
- 이 연구성과는 Otto Brunner, Werner Conze 등과 함께 내놓은 Geschichtliche Grundbegriff: Historisches Lexicon zur politische-sozialer Sprache in Deutschland에 담겨 있다. [↩]
-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통해 근대 국제법적으로는 동등한 자주국가의 위치에 있었는데, 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을 여전히 조공국(朝貢國)으로 보고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오카모토 다카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을 참조하라. [↩]
- 이렇게 보면 이 개념 역시 우리가 이 글 서두에서 막스 베버를 참조하면서 언급했던 근대적 의미의 '정치'와 '국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이 시기는 일본제국에 의해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개념이 주입되는 때이기도 했다. [↩]
- 조선시대 말 '경제'의 도입, 일제 식민지 시기의 전개 등에 관해서는 이승렬, <<제국과 상인: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을 참조할 수 있다. [↩]
- 이 책에서 '책머리에', '변화하는 세계와 개념사', '근대한국의 문명개념 도입사', 이렇게 세 항목을 쓴 하영선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들은 그의 개념사적 통찰보다는 '세상을 개념있게 사는 태도'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
- 이 책의 원제는 '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