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대

강유원 / 2009-11-2 / 서평

요시다 유타카(지음), 최혜주(옮김), <<일본의 군대>>, 논형, 2005. [978899061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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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군대'에 관한 통사인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은 전전의 일본과 같이 징병제를 채용하고 있고, 군대는 특히 젊은이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한국군의 건군과정에서 일본의 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조선인 장병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대와 한국의 군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 책이 한국의 군대를 생각할 때 조금이라도 시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 바람은 지나치게 소박한 듯하다. 일본의 군대와 군대 문화는 한국의 군대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이 책의 독서를 통해서 뚜렷하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군대가 한국의 근대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라는 그리 새롭지 않은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목표라면 적은 노력으로도 적절한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굳이 한국의 군대와 일정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천황의 군대"에 대한 책까지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 운동>>에서 제대 군인이 농촌 사회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내용을 보면서 근대화와 군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가 산업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의 구축과 그것에서 파생된 질서의식의 내재화, 그에 따른 전통 세계의 해체와 재구조화라는 생활세계의 차원으로까지 전개된 것이라면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에서 근대(또는 군대 경험)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가 새삼 궁금해졌고,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유사한 과정을 5,60년 정도 앞서 겪은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는가를 보아야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를 수행한 핵심인물들이 '천황의 군대' 출신자의 부하였다는 사실도 이 책의 독서 동기 중의 하나였다.

먼저 <<그들의 새마을 운동>>1)에서 군대의 역할을 거론한 부분을 살펴보자. 1960년대부터 농촌 마을에는 "청년 이장"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우선 "근대 교육의 이수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기간 국가의 강력한 국민화 프로그램을 첫번째로 이수한 세대로서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자신감과 헌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헌신성 외에 그들의 군대 경험은 "도시성과 근대성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였다." 이들은 농촌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군대 경험이 한국 근대화에서 일종의 긍정적 적극적 계기로 작용한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그러했는가? 일본 근대에서 군대는 그 이상이었다. "일본의 근대적 생활양식은 군대에서 사회로 퍼져 나갔으며, 전전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기반은 바로 농촌의 중간층이었고, 이 계층을 강화시킨 것이 군대였다고 한다. 일본의 군대는 전쟁만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일본의 사회구조 전체를 지탱해 온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옮긴이의 말)

전전의 일본 군대, 정확하게는 '대일본제국육해군(大日本帝國陸海軍)'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군대였다. 이는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에 의해, 그리고 그보다 앞서 1882년에 발포된 군인칙유(軍人勅諭)에 의해 확고하게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천황 이외의 어떠한 정부기관도 육해군에 관여할 수 없게 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육해군은 점차 정부나 의회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러일전쟁 이후에는 정치세력화한 독자적인 군부가 성립한다." 러일전쟁 이후 1945년 8월의 패전까지의 사태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군부가 주역을 맡게 되는데 이때까지 군인각료 비율이 36.8%였다.

전전 일본에서 군대는 "민중의 내면적 지지"를 받았다. 이는 천황의 군대로서의 일본 군대가 전전 일본에서 강고하게 형성된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의 토대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군대는 일본 민중와 천황을 이어주는 강력한 기제였다. 따라서 "15년 전쟁기2) '천황의 군대' 존재상황에 따라", 즉 일본 군대의 형성과 절정기, "지지의 급속한 붕괴"3) 과정을 "내재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절정기, 그리고 쇠퇴의 한 단면을 고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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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는 인간의 몸과 정신 모두에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 동안 인류가 누려온 삶의 방식 위에 구조화된 생활세계를 짧은 시간 안에 폭력적으로 개조하는 일은 평화롭게 진행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산업화의 척도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도시거주 인구 비율이 50%가 넘는가이다. '선진' 산업국가인 영국은 1850년대에 이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숱한 폭력이 사용되었음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1930년대에, 한국은 1960년대에 이 수준에 도달하였는데 이들 후발 산업국에서도 폭력성은 예외없이 드러난다. 그 폭력성은 이른바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밀고나간 독재자들에 의해, 그리고 그 독재자의 의지를 구현한 특정 집단에 의해 유감없이 어김없이 주입되었거니와 1930년대 일본에서는 그 집단이 군대였고, 1960년대 한국에서는 '천황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이가 이끄는 군대였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화는 주도집단의 측면에서 굉장한 친연성이 있다.

후발 산업국에서의 군대의 역할은 저자도 명백히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군대와 사회의 관계에서는 "군대 자체가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출을 위한 추진력이 되거나 군대의 형태가 거꾸로 사회의 형태를 규정해 간다고 하는 시점도 나타남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사태는 "후발형의 근대화를 달성한 국가에서… 보다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군대에 의한 사회의 근대화는 주로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우선 "시간.신체.언어"에서의 급격한 변화로 나타난다. 군대생활은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서 영위된다. 오늘날에도 군에 입대한 신병들은 시간의 엄격함을 실감한다. '오후 한시 반쯤'이라고 말하던 이들은 '십삼시 삼십분'이라는 표현을 낯설어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시간적 규율화"는 군대에서만이 아니라 공장, 학교4)에서도 훈련된다. 다시 말해서 "군대는 공장.학교와 함께 인간을 근대적 시간질서에 맞추어 훈련시키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이는 '생활의 시계화'5)로까지 이어졌다.

근대화는 신체도 새롭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 신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정렬해서 걷는 훈련, 즉 제식훈련을 통한다. 지금도 군에 입대한 신병들이 처음 받는 훈련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제식훈련이다. 똑바로 앉기, 똑바로 서기, 똑바로 걷기 — 이 모든 것이 신체규율의 첫 단추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율화의 밑바탕에서는 '언어의 표준화'가 작동되고 있는데, 특히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대어'는 제대 장병들을 통해 일반 사회로까지 전파된다.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군대어의 사용은 전혀 낯설지 않으며, 특히 운동경기를 둘러싼 처절한 전쟁용어들은 별다른 비판없이 사용되고 심지어 운동선수들에 대한 비인격적 가학적인 훈련까지 정당화되기도 한다. 일본의 군대에서는 군대어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군대에서 '군대어'를 배워 익히는 것을 지렛대로 하여 공통 언어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전후의 일본어 중에도 특수한 '군대 언어'가 그대로 보통 일본어로 정착해버린 사례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를들면 '남은 음식'(잔반, 殘飯), '점검'… '처치할 수 없음', '마구 독려하다', '기합을 넣다'… 등이 그것"인데, 이는 현대 한국에서도 그 연원을 따지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것들이다.

군대가 사회의 근대화에 개입한 또다른 사례는 "군대가 '문명개화'의 추진력이 되었다고 하는 점", 즉 물질문명의 변혁에서 수행한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대에 막 들어온 신병에게는 양복인 군복이 굉장한 문화충격이었으며 "짚신을 신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의 민중은 입영해서 처음으로 군화를 배급받아 구두신는 법을 배웠다." 또한 군대에서의 식사, 특히 육식은 전통적으로 생선만 먹던 일본인들의 식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대 장병들이 자신들의 향촌에서 벌인 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정부와 군이 병사 행정을 통해 지역사회의 조직화"에 나선 것에서 비롯되는데 "러일전쟁 이후 이러한 움직임은 한층 강해졌다." 이는 병영국가화를 위해 동원된 조직화가 군대는 물론 향촌까지도 세밀하게 뻗어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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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라는 존재 자체와 규율이 민중들에게 열렬한 환영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별다른 저항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군대가 민중의 삶에 이익을 가져야 주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군대라는 조직을 겪은 이에 대한 사회적인 대접이 남달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군대는 민중의 삶에 이익과 명예를 주어야 하며, 이것이 더이상 제공되지 않을 때 또는 삶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 즉 격렬한 전쟁이 벌어져 전 국민이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상황 등에서는 군대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철회될 것이다.

일본에서 "징병검사는 '한 사람의 남자'로 간주되는 조건"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군대갔다와야 어른된다'는 속설이 통용되고 있다. 이는 징병검사나 병역이 '인생의례'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병역을 마친 사람들은 종래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근대적 질서를 체득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들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자연적 특권은 무시되고 계급만이 중요한 일종의 군대식 평등을 체험하게 된다. "자신이 상관보다 부유하고 좋은 여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병사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군대는 복종과 평등성이 조합된 최초의 사회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까지도 "이러한 평등성이 군대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군대는 사회적인 신분상승의 통로이기도 했다. 일반 병사들은 최상위에 있는 계급인 상등병으로의 진급을 열렬히 희망했다. "마을의 청년들은 군대에 가게 되면 상등병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명예라고 생각하고… 그 상등병들이 재향군인이 되고 군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자가 되어 극히 간단한 국방론을 열심히 설득하게 된다." "이러한 상등병으로의 강한 진급 희망이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이른바 '훈장'으로 지역사회 중에 커다란 위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신 외에도 군대 자체가 기술훈련 기관으로 인식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해군의 경우 "이른바 어디에나 써먹을 수 있는 군대로서 오래 현역에 복무할 때는 그 복무한 만큼 더욱 고급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훗날의 입지를 정하는 데도 훨씬 좋은 편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군대는 체계적인 근대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고, 신분상승을 노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사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으며, 군부독재 시절만해도 많은 생도들이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고자 했었다. 오늘날에도 자기 지역 출신 '장군'이 배출되면 축하 현수막을 내거는 마을이 있기도 하다.

군대를 신분상승의 통로로서 간주하게 되면 군복무에 열심인 자들은 그만큼 '충량한 병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동시에 이들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담지자이자 전파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강화되는 계기인 "러일전쟁 이후의 시기가 되면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계층이 지역의 민중 가운데 천황제 이데올로기 침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하게 된다."

군대가 여러가지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이익이 손해를 넘어서지 못하면 당연히 군대에 대한 충성도는 약해진다. "군대와 민중 사이에 형성된 밀접한 관계는 15년 전쟁의 패전 시점에서는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에 패했을 때 군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랭했다. 이 상황을 어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 천황의 군대는 종전 후 무기없는 집단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우리들은 민족 자신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국의 땅을 밟아도 조국의 사람들과 마치 남 보듯이 대했다." 여기서 이 작가는 "천황의 군대"가 "민족 자신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담지자이자 전파자였으므로 당연하게도 그것은 "천황의 군대"였으며, 러일전쟁 이후부터 이 군대는 민중과 괴리되는 길을 걸었다. '군부'라고 하는 군사관료기구가 자립적으로 성립되면서 이것이 온 나라를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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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군부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립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라고 보고 있다. 이를 나타내는. 1차 지표들은 1907년 '군령'제정과 '제국국방방침'의 책정과 같은 제도적인 틀이다. "군부의 성립을 나타내는 제2의 지표는 대략 이 시기에 전문적인 군사 관료층의 형성이 완성된 것을 틀 수 있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에는 독자적인 군사사상과 조직원리가 군내부에서 확립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합리성을 결한 정신주의, 경직된 공격 제일주의와 보병의 총검돌격만능론, 그리고 극단적인 전군 획일주의 등등이다." 우리가 일본 제국 군대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이 시기에 비로소 확고하게 정립되었다.6) 그러나 이 시기 일본군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군대'라는 성격이 철저화되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는 전범령(典範令)의 성전화(聖典化)이다. 1907년 이후 일본 군대의 모든 군령은 천황의 재가를 필요로 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에따라 "전범령 자체가 천황의 권위에 따라 절대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개정하려면 대부분의 경우 상주(上奏), 군사 참의관 회의에 대한 천황의 자문, 그 답을 받은 후의 천황의 재가라는 번거로운 수순을 밟아야" 했다. 전범령의 성전화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면적으로 변해버린 전쟁양식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폐해를 낳아놓았다. 본래 일본 "육군의 가상 적국은 일관되고 러시아.소련이고 전범령도 대러.대소전을 위한 교육과 훈련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7)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이 개시되기 이전에 전범령이 개정되어야 했으나 이는 1944년에야 지시가 내려질 정도였다. 시대는 총력전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일본 군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근본적인 자기혁신에 실패했다. 그러하한 모순은 일단 잠복되어 있었지만, 15년 전쟁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대량동원 시대에 분출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일본의 군대가 초기 단계에서 근대화의 추진력이 되어 온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제도의 확충과 공업화의 진전, 더욱이 민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면서 군대가 가진 그러한 추진력은 점차로 쇠퇴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군대는 근대화의 질곡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1970년대 한국에서의 고도 성장기에 나타난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한국은 황군 출신 독재자의 명령에 따른 군대식 조직화를 통해 경제 발전을 성취했으며, 그 유산은 군부 독재가 지속된 1980년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때의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은 2000년대인 지금까지도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며 폭압적 지배를 알삼고 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은 질적으로 풍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는 커녕 오히려 20, 30년 전으로 회귀하는 희귀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결국 어떤 미래를 낳아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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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쇼와의 육해군'은 일본 사회가 낳은 이물(異物)도 귀신의 아들(부모를 닮지 않은 아들)도 아니며, 일본의 근대화가 만든 하나의 귀결"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면서 일본은 미합중국 군정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평화헌법 체제로 전환하였다. 타력에 의해서이기는 하나 일본은 근대화가 낳아놓은 괴물 하나를 제거하였으며, 이제 관료제라고 하는 또다른 괴물을 제거하는 도정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웃 나라 한국은 2009년 현재 어떠한 상황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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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책은 새마을 운동 역시 일제 식민지 시기의 '농촌진흥운동'과의 대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
  2. "1931년 9월 펑텐(奉天) 교외의 류타오거우(柳條構) 부근에서 일으킨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1937), 아시아-태평양 전쟁(1941)을 거쳐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으킨 전쟁" []
  3. 겉으로는 열렬한 찬양을 내보이지만 그 지지자의 내면은 파탄에 이르러 있었고 이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다룬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9788991136038]에 잘 나타나 있다. []
  4. 근대의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학습하고 정해진 시간에 쉬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삼는다. []
  5. 일본 군대의 전술변화에 따라 "미리 명령받은 공격개시 시간에 공격을 개시하거나 적을 정찰하는 척후 등의 독립된 임무에 임하기 위해서도 시계는 병사에게 점차로 필수품이 되어갔을 것이다." "세이코(精工舍, SEIKO)가 육해군 당국의 요청을 받고 육해군 병사가 사용하는 '9형 손목시계 세이코 7석'의 생산을 개시한 것은 1940년도의 일이었다." []
  6. 이러한 특징을 사회에 적용하면 무조건 하면 된다는 식의 신념주의와 무모한 획일주의 등일 것이며, 이는 1970년대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던 황군 출신 지도자가 한국인들의 심성에 새겨준 것으로서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
  7. 전범령이 러시아.소련을 겨냥하고 있었다해도 그 주력부대인 관동군이 실제로 전투에서 이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군대는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러시아 군대의 후신인 소련 군대를 대단한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군은 소련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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