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객관적 공동정신의 형성과 도서관의 임무

강유원 / 2009-11-26 / 특강/기고

경기도 공공도서관 사서대상 정책세미나 특별강연

2009년 11월25일(수) 오전 10:30-12:00
장소: 경기도 고양시 대화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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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을 현재 국무총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정운찬이라는 자(者)가 국회에서 '731부대'에 관한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비웃음을 샀다. 일본제국 군대인 관동군 방역부대, 인간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곳을 모르고 '항일 독립군' 운운 했던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731부대의 나라 일본의 2009년 현재 내각총리대신인 하토야마 유키오이다. 그는 수많은 일본 수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이번에 내놓은 글을 하나 읽으면서 감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앞날을 다시금 생각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글은 "나의 정치철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우애(友愛)"를 정치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로지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켜 본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런 까닭에 방종에 빠지기 쉬운 "자유와 [획일로 치닫기 마련인]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게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필요"하며 이를 그는 쿠텐호프 칼레르기라는 학자에게서 찾아 '우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고, 서민들 등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일이 정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하토야마 유키오는 그런 반론을 예상이나 한듯이 다음과 같을 말로써 자신의 글을 맺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우회해야 할 장기적 논의'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가 혼돈스럽고 불투명하며 불안하면 할수록 정치는 높고 큰 목표를 내걸고 국민을 이끌어 가야만 한다." 이는 모든 정치사상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정치의 목적이다.

오늘날 일본을 아는 이들은, 아니 일본을 잠깐이라도 여행해본 이들은 일본이 전 나라가 골고루 균형있게 발전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전통이 보존되어 있고 그것을 현대의 새로움과 조화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러한 조화가 전국에 걸쳐 있는 것이다. 전통을 잇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시니세[노포(老鋪)]라 불리는 회사와 가게들이다. 현재 일본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2만여개에 이른다. 이동전화기 접는 부분에 들어가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쿄토의 다나카 귀금속사는 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이런 회사는 물론이고 쿄토에 가면 음식점도 300년 넘은게 있다. 그리하여 관련 연구자들을 그런 시니세가 10만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최남단 가고시마까지 이런 기업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런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다나카 총리가 '국토개조론'을 내걸어 나라 전체를 균형있게 개발하는 장기계획을 세워 시행해왔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이른바 '다초점 국가'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오래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먼 앞날을 내다보는 균형잡힌 미래비전의 제시,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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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등장 무렵 벌어진 사건들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또다른 생각은 공동지식의 부재였다. 분명히 정운찬은 '731부대는 항일독립군'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역사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역사지식의 부재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 사람 잘못일까? 다시 말해서 정운찬의 무식이 정운찬 개인의 식견과 독서가 모자라서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구조적 원인이 있는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보자. 정운찬은 거시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과 교수였다. 한국에서는 경제학과 교수건 학생이건 한국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하지 않는다. 공부의 과정에서 그걸 배우도록 강요하는 제도도 없다. 정운찬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무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전국의 경제학과 교수들에게 731부대를 아는지, 그걸 아는게 국무총리 자격요건을 구성하는지 물어보자. '아니'라는 대답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정운찬은 재수없이 걸린 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수없음을 말하기 보다는 무지를 탓한다. 왜 그럴까? 한국 사람들의 민족애가 유별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일종의 공동지식의 부재를 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난이 무색하게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것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일제고사 성적이 잘 나오는 초등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 학생의 부모는 분명히 아이를 과고나 외고에 보내려 할 것이다. 이것이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기를 쓰고 일제고사를 고수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과학고 진학 희망이라 해보자. 그 학생은 중학교 1학년까지는 국.영.수.과를 열심히 공부한다. 2학년부터는 수학과 과학만 죽어라고 한다. 사회는 아예 제쳐둔다. 외고가는 학생은 수학, 과학 제쳐둔다. 어쨌든 사회, 역사는 열심히 안한다. 자신의 무지에 무지하다. '무지에의 자각'이 공부의 출발점인데, 그런 자각이 없으니 습득을 다그칠 수도 없다. 이게 외고 교장들이 외쳐대는 "글로벌 인재"의 현상태이다. 무슨 글로벌 인재가 '세계'를 모르나. 이런 자가 외무고시에 봐서 외무부 취직하면 뭘하겠는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사람 만나서 무슨 외교를 하겠나.

이러한 무지는 실용적인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학문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철학은 추상적인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추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논증추리와 분석이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등장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 구체적인 배경은 아테네의 민주정, 스파르타의 과두정, 델로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동맹 등의 항목을 내용으로 가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당연히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독서와 선이해(先理解)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커녕 서기전 몇 세기라는 시대에 대한 감각조차 없다. 춘추시대의 공자에 관한 문헌인 <<논어>>에 대한 이해에도 이러한 역사지식이 필수인데, 그게 없으니 도무지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국사와 세계사가 모든 이의 필수 과목도 아니며, 몇몇 똑똑한 아이들은 아예 제쳐두는 '매니아 과목'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에서 정운찬의 무지만을 탓할 수가 없다. 오늘날 중등 교육이 전문화라는 이름 아래 공동의 정신적 자산에 대한 교육을 모두 폐기하고 그것들을 소수 매니아들의 유희로 전락시킨 결과가 당연하게 뿜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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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교육(公敎育) 정상화'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때 '공교육'은 무엇을 의미할까? 학교와 같은 공공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반대말은 사교육(私敎育)이다. 사교육은 흔히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집에서 홈스쿨링하는건 뭘까? 이건 개인교육일까? 그런데 의문나는게 있다. 학원을 사교육기관이라 하는데 과연 학원이 사적인 공간인가. 엄연히 국가의 허가를 받아 공공장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아닌가.

나는 공교육이라는 말을 공교육(共敎育)으로 이해한다. 학원은 특수한 곳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공교육에서는 우리 국민의 공통지식을 모두 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문과 이과 나눌거 없이 모든 과목을 모든 학생이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공통으로 배우고 수학 더 배우고 싶은 특수한 학생들은 수학 학원을 특별히 다니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의 학과에 따라 심화지식에 대한 요구가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들 나누어서 조금 더 가르치고, 적어도 2학년 2학기까지는 모든 학생이 공통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다수는 대졸자가 아니다. 그러니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한 교육정책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할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이들 다수에게는 고등학교 교육이 인생의 마지막 공부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중등교육의 충실화이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통의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똑똑하다 자부하는 이들은 모두 교육문제는 대입제도라는 틀에서 논의를 벌이고 있다. 공통의 지식에서 생겨날 공동의 자산은 그들 사이에서 아주 무시되고 있다.

공교육은 공공기관에서 행해지는 교육이 아니라 공동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라져버렸고, 그에 따른 폐해는 실로 막심하다. 우선은 앞서 말했듯이 대학교육 자체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글로벌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 출신자들이 글로벌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전문 지식인이 될수록 더 심해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들이 공통으로 가진 지식이 없다는 데서 생겨난다. 한 국가의 정신은 물질문명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이 휴대폰을 쓰고 이메일을 사용한다해서 그들이 공동의 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들이 공동정신을 가지려면 공동의 언어와 공동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소통의 출발점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공교육 종사자들은 '공교육(共敎育) 정상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공화국(共和國)은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나라다. 공화주의의 이념은 바로 교육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교육통합은 사회통합의 시작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공교육 정상화의 시작점이다. 이것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공교육 종사자라해도 사교육 업계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대 특정한 국가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기관의 목표는 바로 이것, '객관적 공동정신의 형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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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서관 역시 공교육 기관의 하나로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학교 교육은 어그러질대로 어그려져 있다. 책을 읽는 일은 아주 희귀한 몇몇 학생들의 취향이 된 지 오래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하면 공부는 물론이고 책읽기조차 특별한 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도서관은 지역에 관한 세밀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현 상황에 눈높이를 맞추면서도 그들을 객관적 공동정신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도서관 사서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새겨두는 것이 절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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