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의 경쟁

강유원 / 2009-12-6 / 서평

민두기(지음), <<시간과의 경쟁>>,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1판 2쇄. [9788971415443]

1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형성된 개념들을 다룬다. <<일본의 군대>>,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도 같은 시대를 탐구대상으로 한다. '동아시아', '근대' 등이 이 책들을 관통하는 술어들이다. 동아시아사를 연구한 한국의 역사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조망하고 있을까? 2000년에 작고한 민두기 교수의 책은 이 물음때문에 읽었다. 세세한 역사적 실증보다는 노대가의 통찰로써 일종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학적인 유산에 관한 평가는 내 능력 밖이고, 학문외적 잔여에 대한 소회는 거론이 마땅치 않다.

이 책에서는 책 제목이기도 한 "시간과의 경쟁"과 "19세기 후반 조선 왕조의 대외 위기의식"만을 집중 독서하였다. 전자는 역사론에 가깝고 후자는 아주 협소한 범위의 사건을 다루고 있어 서로 대비된다.

2
"시간과의 경쟁"은 20세기 동아시아 — 특히 중국과 일본 — 의 변화에 대해 아주 개괄적으로 논한다. 범위가 무척이나 넓어서 조밀함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성김이 내가 원한 것이다. 천변만화하는 이른바 '격동'의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은 그러한 유유함에서만 얼핏이라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드러냄은 삶과 공부를 회고하며 정리하는 노교수에게서 문득 흘러나오는 한마디에서 얻어들을 수 있는 것이지 세속적 경력과 공명을 추구하는 젊은 역사학도에게서는 발현되지 않는다.

필자에 따르면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 중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이 두 나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주축이다. 달러가 유일의 기축통화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른바 다축통화가 거론되는 시기에 다섯 안에 들어가는 통화를 운용하는 나라들이 되어 이제는 세계의 주축으로까지 발돋움하였다. 20개 나라가 돌아가면서 맡는 G20 의장국 순서가 되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한국은 여전히 섬돌 아래에 있다. 이것이 국제적 현실이건만 이것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19세기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 정보부족이 아닌 정보를 파악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이들 두 나라가 21세기 세계의 주축 대열에 끼게 된 것은 20세기의 우여곡절을 겪어오면서도 뭔가를 잘 갈무리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경과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필자에 의하면 이 두나라는 "그 시대적 과제를 추구함에 있어 몹시 조급하여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했었다." 중국은 "亡國이라는 위험을 다급히 제거해야" 했고,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 침략의 수단을 조급하게 그리고 절제없이 사용하였다." 조급증은 정치권력에게 편중된 힘이다. 그 힘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자신의 영역을 넘어 "본래 자율적이어야 할 사회적.문화적 변화에게까지 크게 작용"한다. "이것 역시 동아시아 역사 발전의 주된 특색의 하나이다." 조급함 — 이는 당연히 경계해야겠지만 한 나라의 성원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갈 때에는 막아서며 나서는 이도 없고, 설혹 누가 물길 가운데로 걸어간다해도 물결이 그를 휘감아 버리고 만다. 그러하니 여기서 정확한 인도를 기대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도의 결핍은 그 공동체에는 물론이요 주변국과 세계에게도 재난을 가져온다. 20세기 전반기에 발병했던 일본의 조급증이 바로 이러한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조급증이 최소한 한 공동체에게 여간해선 회복하기 어려운 재난을 가져온다는 점을 감지해 두어야겠다. 역사의 전개는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인간의 발원(發願)과 그에 이은 유위(有爲)를 아무리 쌓아도 때가 차지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조급함은 "역사 전개의 비정상을 초래"한다는 것, 이것이 역사에서 도출되는 메타역사적 전갈인 것이다.

이 논문은 말미에 '결론'이 아닌 "餘論"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최대.최악의 질병이었던 아편 흡식의 풍습"을 정치적.권력적 차원의 힘과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사례로서 거론한다. 아편 흡식은 누가 보아도 못된 풍습이다. 따라서 그것을 퇴치하려는 "拒毒運動"이 꾸준히 전개되었으나 정치권력은 "재정적 急需를 메울 아편의 換金性이란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아편 흡식 근절은 불가능하였다." 여기에는 각 지방의 군벌, 국민당 정권, 연안(延安)의 공산당 정권, 일본 침략자들까지 예외없이 가담하였다. "1949년 이후에 가서야 아편 흡식의 악습이 제거된 것은 중공 정권의 강력한 침투력과 의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편의 환금성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 사태를 두고 "20세기사에서의 특기할만한 사회적 변화임이 분명하다"고 평가한다.

결론이 아닌 "餘論"은 사유의 비약을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이는 정치와 문화의 연결에 이러한 비약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아편 흡식은 절연키 어려운 습관이다. 개인의 삶을 병들게 하고 국망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의 흡식과 절연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와 결단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그것의 사회적 유통에는 필경 정치적 요소가 관여되어 있으며, 특히나 그것의 환금성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결정적이다.1) 따라서 아편 흡식을 둘러싸고 100여년에 걸쳐 일어난 사태에서 우리는 몹시 고약한 습속이라해도 그것을 조장하고 끊어내는 근원적인 힘은 정치권력이 쥐고 있다는 것, 그것은 경제적 요인을 매개로 개인과 사회로 관철된다는 것, 환금되는 것이 달라지거나 환금의 방식이 전혀 새로워짐으로써 습속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는 21세기에 살아갈 이들이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20세기사에서의 특기할 사회적 변화"인 것이다.

3
"19세기 후반 조선 왕조의 대외 위기의식"은 1, 2차에 걸친 중영전쟁2)을 논의 배경으로 삼는다.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던 중국에 대한 영국의 침입을 실마리로 삼는 까닭이 논문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동아시아 근대화의 전개 양상은 19세기 후반 근대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 양태의 차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서양의 군사적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그에 대응하려고 하였는가가 잘 밝혀져야 근대화 과정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인을 보다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으로 한국 근대화의 시작을 다양한 요인들로써 탐구한다. 이를테면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는 '문명', '권력', '주권', '부국강병', '세력 균형', '민주주의' 등의 개념이 도입되고 한국에서 변천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는데, 이 개념들은 한국이 서구와 접촉한 어떤 사태들을 표상하고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이차적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개념들만 보아서는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가 시발점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과 "그에 대한 대응양태"를 살펴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조선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는 주로 조선에 대한 직접적 침략인 "1866년의 불란서 함대의 공격 이후"가 다루어져왔다. 그런 점에서 1840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시기에 두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검토하는 것은 이후 직접적인 침입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조선에 대한 서양세력의 직접적인 침략이 조선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은 중영전쟁의 경과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고, 그에따라 적절한 대책을 세울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후 벌어진 불란서 함대의 공격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불비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 왕조의 반응을 성격지우는 것은 결코 정보 자체의 부족일 수는 없고 조선 왕조 스스로의 정보 평가 능력이나 조선 왕조가 처해 있는 상황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필자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어느 시대이건 외교적 현안에 대한 반응과 대책에서 정보의 양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보 평가 능력"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차 중영전쟁은 통상(通商)요구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전쟁에 패함으로써 영국에게 통상을 허락하였다. 이 패전이 조선에게는 "통치권의 상실 같은 사태를 수반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패전"으로 보였고, 그에따라 "이 전쟁의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 "제1차 중영전쟁이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으로서는 아편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들 수" 있을 정도다. 2차 중영전쟁이 종결되면서 북경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大英', '大法', '俄羅斯', '亞美理'의 洋夷와 新約을 맺어 천주교 전수 학습을 금하지 않고 보호"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내용을 공식확인한 뒤 조선 조정에서는 중신들의 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국왕 철종은 대신들에게 대비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국왕의 촉구에는 사태 인식의 일단이 들어있다: "燕京이 위태로우면 우리나라라고 어찌 편안하겠는가. 또한 그들이 講和라고 한 것(조건)에는 단지 교역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다. 倫常을 없애고 손상시키는 術을(즉 기독교를 지칭함) 四海에 전염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그 害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왕의 관심의 "초점은 나라가 점령된다든가 하는 것보다는 西洋諸國이 군사적으로 기독교 포교를 조선에도 강요해 오면 어찌할 것인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영전쟁의 핵심은 군사적 침입인데, 그것은 도외시한채 사술(邪術)의 전염을 중시하게 되면 대응은 군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북경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이 동요하여 朝臣 가운데도 시골로 낙향해 버리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는데도 조선은 군사적인 방책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의식은 "대내적인 自修의 강조로 나타났다. 自修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군주의 도덕적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에 달한 민생의 어려움, 행정의 무능. 부패 등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었다. 대외 위기의 실체를 탐색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직접 대응의 형태로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내수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조정의 국왕이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중신들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4
대외위기에 대한 대응은 사태에 대한 객관적 정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보를 다루는 태도이다. 19세기말 중영전쟁에 대한 조선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덧붙여 둘 수 있는 것은 1602년에 마테오 리치와 이지조가 함께 만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태도이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도 필사되고 목판 인쇄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1708년(숙종 34년) 관상감에서 제작한 '곤여도병풍'이다. 마테오 리치는 이 지도를 만들면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이 타파될 계기가 마련될 것을 기대하였으니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 지도를 통해 그러한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화이론적 문화심성이 과학적 세계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을 알았지만 중화론적 문화심성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근대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정치군사적 권력의 매개를 필요로 했다."3) 그런 점에서 조선이 근대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들은 이 논문이 시사하고 있듯이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들이라 할 수 있겠다.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받은 것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조급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도 뭔가 남겨둘 수는 있었다. 조선은 조급하지도 남겨두지도 못했다.

Post to Twitter

  1. 근자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아편밀매를 통해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보고가 있으며 강대국의 비밀정보기관이 마약사업에 관여했다(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에 관해서는 <<국경없는 조폭 맥마피아>> 참조. []
  2. 1840-1842의 1차 중영전쟁은 '아편전쟁'이라고도 불리며, 1856-1860의 2차 중영전쟁은 '애로우호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
  3. 장인성, <<근대한국의 국제관념에 나타난 도덕과 권력>>, p. 21, 각주2. []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