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입학식

강유원 / 2010-2-22 / 서평

김문식(지음), <<왕세자의 입학식: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문학동네, 2010. [9788954609944]

조선시대 행사에서 '禮(예)'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국가에서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 중에서 왕세자가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로는 책봉례(冊封禮), 관례(冠禮), 가례(嘉禮), 성균관 입학례(入學禮) 등이 있었다. 이 네가지 예는 비슷한 시기에 거행되었는데, "다른 행사는 모두 궁궐에서 거행하지만 입학식은 성균관에서 거행한다는 점이 달랐다." "세종대 이후로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거행했다." 왕세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궁궐에서 나와 입학의 예를 올린 것이다. 이때 "입학생은 왕세자 뿐이었다. 한 사람의 입학식을 거행하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한양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백성들은 길거리로 몰려 나와 구경을 했다."

처음으로 "성균관에서 원자(元子)의 입학식이 거행된 것은 1403년(태종 3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성균관에 도착한 원자 양녕대군은 먼저 대성전(大成殿)으로 가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했다."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온 입학례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중단되었다. "신식학교가 세워지고 교육과정이 완전히 개편되면서 성균관은 더이상 국가의 중추적인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황실의 가족들도 신식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이 건국초부터 성균관에서 왕세자의 입학례를 거행했으며, 그 행사는 멸망과 함께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입학례의 기록적 근거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있다. 중국 양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입학례가 실제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당나라 이후로는 입학례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원 제국 시기에 만연된 몽골의 풍속을 일신하기 위해 대민교화책을 전면적으로 촉진하고 <<오경대전>>, <<사서대전>>, <<성리대전>>과 같은 유가텍스트가 집대성되었으며 유가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수행된 명에서조차 이러한 입학례가 거행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중국에서는 유가의 전면적 국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왕실에서는 건국 초기인 태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꾸준히 입학례를 거행했다. 따라서 입학례는 학문과 예의를 중시했던 조선 왕실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의식"이라 할 수도 있고, 더나아가 조선 왕조의 이념이 얼마나 확고하게 유지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궁궐에서 거주하는 왕세자의 입학례가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다는 것에는 유의할만한 점이 있다. 입학례를 거행하기 위해 왕세자는 궁궐을 나와야 하며, 성균관에 도착한 다음에는 왕세자로서의 지위를 일시적으로 상실한다. "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 왕세자 입학식이 거행될 때 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아니라 성균관의 학생이라는 자격에 부합하는 대접을 받았다." 성균관에서 학생으로서의 예를 거행한 다음 왕세자는 다시 궁궐로 돌아가 왕세자의 자격을 되찾지만 성균관에서의 예를 거침으로써 그는 유가적 이상을 실현할 군왕으로서의 의무를 상징적으로 부여받은, 거듭난 왕세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으로서의 왕세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두가지를 통해서이다. 하나는 성균관에 도착한 왕세자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복장보다도 더 강한 상징적 행위인데, 왕세자가 명륜당(明倫堂)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스승은 책상 위에 책을 펴놓고 강의를 하며, 왕세자는 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았다. 스승이 동쪽에 앉아 책상을 사용하는 반면에 왕세자는 서쪽에 꿇어앉아 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스승이 왕세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장차 왕 위에 오를 왕세자일지라도 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스승에 대한 예절을 지켜야 하며, 이런 수련을 통해서 학문과 덕망을 갖춘 성군(聖君)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국왕에 의해 시비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1625년 인조는 왕세자 입학식을 거행하면서 왕세자가 사용할 책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였지만 예조는 이에 반대했다. 예조의 반대는 다음과 같았다: "입학례의 성대한 의식은 한 나라의 최대 경사입니다. 조종 조에는 이미 내려오는 절목이 있는데, 책상은 박사 앞에 두고 세자는 자리만 깔고 책을 받는 것으로 스승과 생도의 예를 실천합니다. 이는 실로 옛 입학례의 제도를 본받은 것입니다. 책상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효종은 왕세자인 헌종의 입학례 때 "어째서 스스로 낮추는 예 때문에 경전을 바닥에 놓는단 말인가"라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경전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들어 왕세자가 바닥에 엎드리는 일을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는 완강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예"를 우선했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궁궐이 아닌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른 것에는 또다른 시사점이 있다. 왕세자는 궁궐에서 생활하고 그에 대한 교육은 궁궐에서 행해진다. 이 교육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시강관들이 수행한다.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학습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왕세자 한 사람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20명의 시강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이 아니라 궁궐 안에서 국왕을 키우는 세자시강원이었다." 이처럼 세자시강원이 있는데도 굳이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생으로서의 지위를 자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물론 성균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입학례가 성균관에 의해 주도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입학식에서 스승이 되는 박사는 성균관의 직임을 가진 대제학이 담당했고… [여러] 역할도 모두 성균관의 유생이 담당했다. 이처럼 성균관이 주도하는 입학식에서 조정의 유력자가 끼어들려고 하면 성균관 쪽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 원칙을 훼손하려는 국왕의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번번히 좌절되었다. 성균관은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인데 여기서는 국립대학이라해도 정치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궁궐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은 것이다. 정치와 학문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조선에서도 사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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