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번역작업만이 아니라 원고작업을 할 때 저는 일단 행간을 넓게 잡아 만년필로 초고를 씁니다. 번역의 경우 이렇게 초고를 만든 다음, 원문과 대조하면서 검토하고 고칩니다. 영역본이나 일역본이 있을 경우 함께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해서 원고가 완성되면 그때 컴퓨터로 입력을 합니다. 입력이 끝나면 이것 역시 행간을 넓게 잡아 출력을 한다음 다시 검토합니다. 그런 다음 원고를 수정하고 출력해서 맞춤법 등을 살피고 문장을 다듬은 다음 워드 포맷 문서와 pdf 포맷 문서를 만들어서 편집자에게 보냅니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원전의 페이지 수를 난외에 표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출력을 해서 그걸 적어서 함께 줍니다. 이렇게 보면 컴퓨터가 제 작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타이프라이터 정도입니다.
초벌번역을 하고 입력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중의 하나는 용어의 일관성을 기하는 것입니다. 한 권의 책만 잡고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앞에서 사용한 번역어와 나중에 골라낸 번역어가 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는 '임금노동'이라 했는데 똑같은 단어를 뒤에서는 '임노동'이라 한 경우가 발견되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등을 확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양'이라 번역한 것이 문맥에 따라 '폐기'로 옮겨진 경우도 있는데, 어쨌든 이런 것들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전인 경우에는 특히 신경써야 하며, 나중에 편집자가 검토할 때에도 이런 것때문에 골치아플 수가 있으므로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때 주요 용어해설을 함께 주거나 일종의 글로서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은 번역자의 자세입니다.
2. 100% 확신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올 경우에는 일단 처음에 생각한 대로 옮깁니다.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똑같은 상황에 처하므로 대강이라도 번역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다음 검토를 할 때에 영역본이나 일역본을 참조하거나 끝까지 번역하면서 뜻을 터득하여 알게 된 것을 적습니다. 처음으로 번역되는 원전인 경우에는 참조할만한 책이 없을 수 있는데 이때에는 주변에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묻기도 합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질정'을 기대하면서 출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영어 원문 속에 다른 외국어가 나올 경우에는 좀 복잡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예전에 armarius.net BBS에서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번역과 관련하여 적은 것이 있으니 옮겨 적겠습니다: "벤야민이 인용한 발레리의 글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관해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문장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앞서 그들의 텍스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부터 정리해야 하리라 여겨서 입니다. 불어 원문과 독일어 문장을 대조해보면 벤야민은 발레리의 글을 '직역'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어 번역은 발레리의 불어 원문을 번역해 넣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벤야민의 독일어 문장을 번역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겨납니다. 상식적으로는 전자가 마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발레리의 글이라해도 벤야민의 글 안에 들어온 이상, 그것은 이미 벤야민의 텍스트가 되었고, 그에 따라 벤야민의 문장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의 이 글은 분명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기술적 복제가능성 시대의 예술작품에 관한 벤야민의 통찰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실수로 오역을 했건, 일부러 그렇게 옮겼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없는 우리는 일단 벤야민이 그렇게 옮긴 이유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발레리의 원문과는 관계없이(물론 발레리의 원문은 본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 보아야 할 것이긴 합니다) 독일어로부터 옮기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제법 있습니다. 가령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라모의 조카>>, <<안티고네>> 등으로부터의 인용이 있습니다. 인용부호가 달려있지도 않을 뿐더러 정확한 문장과 구절이 인용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럴 경우 번역자는 헤겔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고 '본래는 이러저러한 문장이었는데 그것을 헤겔은 이렇게 적은 듯'이라는 번역자의 해설을 붙입니다. <<법철학>>에 보면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인용도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도 <<파우스트>> 원문을 통해서는 뜻을 이해하고 번역은 헤겔의 말을 옮기는 것입니다. 또다른 사례는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노트에는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구할 수 있었던 아담 스미스 <<국부론>> 불역본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MEW 본문에는 불어 문장이 그대로, 하단 각주에 그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한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이럴 경우 한국어판 번역자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번역해야 하는지가 문제될 수 있겠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영어원본에서 번역한 김수행 교수의 번역본을 그 곳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관한 한 네 종류의 텍스트가 놓여있는 셈입니다. 영어 원전, 마르크스가 읽은 불역본, MEW 편집자가 번역한 독일어 본, 영어 원전으로부터 번역된 한국어판. 저는 당연히 불어 문장으로부터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원문과 대조해보면 불어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우리가 편리한 수준에서 읽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그릇된 번역의 가능성을 가진 텍스트를 가지고 <<국부론>>을 읽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http://www.allestelle.net/bbs/view.php?id=www_bbs&no=2900 ) 이때 자신이 독일어나 불어를 모른다면 아는 분에게 물어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역자후기 등에서 도와준 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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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번역한 책들 몇 권을 거론하면서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9788931321128]입니다. 역자후기( http://allestelle.net/resources/2006/12/12/119 )를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최대한 직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문장 대 문장은 물론이고 단어 대 단어까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해설서를 쓸 예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9788956440712] 역시 같은 원칙에 따라 작업했습니다. 이 책은 벌린의 강연을 책으로 펴낸 것이기 때문에 문장이 긴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저는 그 호흡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이 강연의 효과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마르크스의 저작이지만 <<공산당 선언>>[9788931360226]은 제가 해설서를 써둔 것도 있고,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감안하여 문장을 매끄럽게 많이 다듬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레토릭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신경썼습니다.
위의 세 권의 책이 원문과 대조해서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파시즘>>[9788990024749]은 조금 다릅니다.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에 속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개설서입니다. 가능하면 독자가 책 그 자체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자기계발서라 할 수 있는 <<달인>>[9788990985309]은 원문과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윤문도 심하게 했고, 한국에서의 상황에 걸맞지 않는 것들은 고치기도 했습니다.
번역의 원칙을 이렇게 세우는 것은 착수하기 이전에 결정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반의 문장과 후반의 문장이 상당히 다르게 됩니다. 또한 고전의 경우라면 번역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역자해설이나 용어해설을 어떤 수준으로 어디까지 쓸 것인가, 아니면 아예 별도로 해설서를 써낼 것인가 등도 고려해야 하며, 역자해설을 쓴다면 그것의 초고도 함께 작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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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고전이건 개설서건 뭐건 간에 '가장 잘 읽히는 것을 잘 된 번역'으로 인정하는 고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판매를 염두에 둔 출판 영업자의 말이라면 용인하겠습니다만 번역 비평한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그런 말들을 하곤 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유혹에 시달리신다면 다음 링크에 있는 marishin 님의 코멘트를 참조하십시오. http://www.allestelle.net/bbs/view.php?id=www_bbs&no=4686
Posted 2009-04-12 17: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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