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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description>
	<pubDate>Thu, 11 Mar 2010 02:43:1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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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저항과 아만 &#8212; 호동거실 평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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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1 Mar 2010 02:43:10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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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박희병(지음), &#60;&#60;저항과 아만 &#8212; 호동거실 평설&#62;&#62;, 돌베개, 2009. [9788971993637]
&#034;이 책은 송목관(松穆館) 이언진(1740-1766)의 호동거실에 대한 평설이다.&#034; 이언진은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의 &#039;여항문학 작가&#039;인데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034;우리 고전문학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괴물이자 이단아인 이언진의 진면목을 복원&#034;하는 일을 첫번째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그는 이언진의 시집인 &#60;&#60;호동거실&#62;&#62;을 읽는다. 즉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박희병(지음), &lt;&lt;저항과 아만 &#8212; 호동거실 평설&gt;&gt;, 돌베개, 2009. [9788971993637]</strong></p>
<p>&#034;이 책은 송목관(松穆館) 이언진(1740-1766)의 호동거실에 대한 평설이다.&#034; 이언진은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의 &#039;여항문학 작가&#039;인데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034;우리 고전문학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괴물이자 이단아인 이언진의 진면목을 복원&#034;하는 일을 첫번째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그는 이언진의 시집인 &lt;&lt;호동거실&gt;&gt;을 읽는다. 즉 &#034;이언진은 &lt;&lt;호동거실&gt;&gt;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에 이 시집을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그것이 가능할&#034; 것이라 여긴다.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려면 시를 꿰뚫어 읽는 독해가 요구된다. 그러니 이 책의 첫번째 목표와 방법은 어설픈 각오로는 시도할 수 없는 것이요, 이 시도가 성취되면 시 읽기는, 화려한 수사와 빈천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034;자의적 해석이나 피상적 감상으로 귀착&#034;되는 일반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이 책의 또다른 목표, 즉 &#034;한국 학계의 시 연구 수준을 좀 더 끌어올리는 일&#034;에 해당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학계의 시 연구 수준이 높지 않은 까닭은 &#034;무엇보다도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읽기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034;는 데에 있다. 텍스트 읽기는 시 연구에서만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 일반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서와 마찬가지의 사정이 인문학 전반에서 보인다. 우리가 &#034;클로스 리딩close reading&#034;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연구의 수준은 높아질 수 없거니와, 이 책은 시연구자들만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034;미세한 문제에서부터 세세히 따지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큰 문제에 대해서까지 요모조모 사유하고 음미하는 데 이르는&#8230; 텍스트 읽기 방식&#034;을 연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p>
<p>&#034;이 책은 다소 특이한 체제를 취하고 있다. 평설이 시작되기 전에 &#039;독호동거실법&#039;이라는 긴 글이 나오고, 평설이 끝나면 &#039;독호동거실후&#039;라는 짧은 글이 나온다. &#039;독호동거실법&#039;은 이 책의 도론(導論)에 해당하고, &#039;독호동거실후&#039;는 이 책의 결론이라고 보면 될 터이다.&#034; 시에 대한 안목은 없으나 텍스트 읽기의 구체적인 방책을 터득하고자 하는 독자는 &#039;독호동거실법&#039;을 꼼꼼하게 읽으면 되겠다. 이 도론은 방책을 설명하면서 종전의 연구들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034;늘 논의되는 작품만 갖고 논문을 쓰다보니, 작품을 읽고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 논문을 읽고 논문을 쓴 꼴이 되어 버렸다&#034;는 것이다. 철학 논문에서도 이러한 일이 더러 발견된다. 가령 도서관에 가서 어떤 철학자의 텍스트에 관한 학위논문들을 열 편 정도 대조 검토해보면 각 논문들이 인용한 원전 텍스트의 구절들이 대체로 겹친다. 면밀한 강독이 없으니 새로운 구절들을 발견할 수 없고, 그에따라 다른 이가 인용한 구절만 되풀이해서 인용하기 때문이다. </p>
<p>시의 경우 &#034;정확한 텍스트 읽기&#034;를 하려면 당연히 &#039;맥락&#039;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lt;&lt;호동거실&gt;&gt;에 관한 &#034;기존의 연구들은 대체 시적 맥락을 꼼꼼히 따져 가며 있기 보다는 단장취의적(斷章取義的)으로, 다시 말해 시적 맥락을 무시하고 연구자가 제 보고 싶은 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034;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 흥에 겨운 읽기를 즐겨하는 이들이 텍스트에 대해 뭔가 멋진 것을 말하고 싶은 때에는 섣부른 도식화를 시도한다. &lt;&lt;호동거실&gt;&gt;을 읽을 경우 중요한 것은 &#034;다채로운 &lt;&lt;호동거실&gt;&gt;의 세계, &lt;&lt;호동거실&gt;&gt;의 다른 여러가지 지향들, &lt;&lt;호동거실&gt;&gt;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관점과 시선들, 시인이 서있는 경계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달 수 있는 &lt;&lt;호동거실&gt;&gt;의 내적 모순들&#034;인데, 많은 연구자들은 도식적으로 &#039;반중세&#039;니, 더나아가 &#039;근대&#039;니 하는 개념틀들을 적용함으로써 이것을 묻어버리고 마는 것이다.</p>
<p>&lt;&lt;호동거실&gt;&gt;읽기는 시대사 탐색에도 도움이 된다. &#034;18세기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조선의 문예부흥기요, 문화적 성세(盛世)라고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8230; 그렇긴 하지만 이 시기 사대부 문화의 현상적 융성은 어디까지나 사대부 &#039;문화틀&#039; 속에서의 발전이요 변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발전이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청대(明淸代) 중국 문화나 예술의 아류적 수용에 가까운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034; 이언진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호들갑에서 벗어나 &#034;18세기 조선 사대부 문화의 허상과 취약점, 그 국한성을 읽어 내는 하나의 중요한 시좌(視座)를 확보하게 된다.&#034; 체제내화된 사대부들의 텍스트만 읽을 때에는 감지할 수 없는 반역성 &#8212; 근대성이 아니다 &#8212; 을 발견함으로써 시대에 대한 균형잡힌 통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p>
<p>&lt;&lt;호동거실&gt;&gt;의 시적 의의에 관한 논의는 내 역량을 벗어난다.</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C%A0%80%ED%95%AD%EA%B3%BC+%EC%95%84%EB%A7%8C+%E2%80%94+%ED%98%B8%EB%8F%99%EA%B1%B0%EC%8B%A4+%ED%8F%89%EC%84%A4,+http://allestelle.net/?p=1607"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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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왕세자의 입학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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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1 Feb 2010 20:11:41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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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김문식(지음), &#60;&#60;왕세자의 입학식: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62;&#62;, 문학동네, 2010. [9788954609944]
조선시대 행사에서 &#039;禮(예)&#039;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국가에서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 중에서 왕세자가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로는 책봉례(冊封禮), 관례(冠禮), 가례(嘉禮), 성균관 입학례(入學禮) 등이 있었다. 이 네가지 예는 비슷한 시기에 거행되었는데, &#034;다른 행사는 모두 궁궐에서 거행하지만 입학식은 성균관에서 거행한다는 점이 달랐다.&#034; &#034;세종대 이후로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된 사람들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김문식(지음), &lt;&lt;왕세자의 입학식: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gt;&gt;, 문학동네, 2010. [9788954609944]</strong></p>
<p>조선시대 행사에서 &#039;禮(예)&#039;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국가에서 거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 중에서 왕세자가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로는 책봉례(冊封禮), 관례(冠禮), 가례(嘉禮), 성균관 입학례(入學禮) 등이 있었다. 이 네가지 예는 비슷한 시기에 거행되었는데, &#034;다른 행사는 모두 궁궐에서 거행하지만 입학식은 성균관에서 거행한다는 점이 달랐다.&#034; &#034;세종대 이후로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거행했다.&#034; 왕세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궁궐에서 나와 입학의 예를 올린 것이다. 이때 &#034;입학생은 왕세자 뿐이었다. 한 사람의 입학식을 거행하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한양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백성들은 길거리로 몰려 나와 구경을 했다.&#034; </p>
<p>처음으로 &#034;성균관에서 원자(元子)의 입학식이 거행된 것은 1403년(태종 3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성균관에 도착한 원자 양녕대군은 먼저 대성전(大成殿)으로 가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했다.&#034;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온 입학례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중단되었다. &#034;신식학교가 세워지고 교육과정이 완전히 개편되면서 성균관은 더이상 국가의 중추적인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황실의 가족들도 신식학교에 입학했다.&#034; 조선이 건국초부터 성균관에서 왕세자의 입학례를 거행했으며, 그 행사는 멸망과 함께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입학례의 기록적 근거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lt;&lt;예기(禮記)&gt;&gt;에 있다. 중국 양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입학례가 실제로 거행되었다. &#034;그러나 중국사에서 당나라 이후로는 입학례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034; 원 제국 시기에 만연된 몽골의 풍속을 일신하기 위해 대민교화책을 전면적으로 촉진하고 &lt;&lt;오경대전&gt;&gt;, &lt;&lt;사서대전&gt;&gt;, &lt;&lt;성리대전&gt;&gt;과 같은 유가텍스트가 집대성되었으며 유가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수행된 명에서조차 이러한 입학례가 거행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중국에서는 유가의 전면적 국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034;이에 비해 조선 왕실에서는 건국 초기인 태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꾸준히 입학례를 거행했다. 따라서 입학례는 학문과 예의를 중시했던 조선 왕실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의식&#034;이라 할 수도 있고, 더나아가 조선 왕조의 이념이 얼마나 확고하게 유지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p>
<p>궁궐에서 거주하는 왕세자의 입학례가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다는 것에는 유의할만한 점이 있다. 입학례를 거행하기 위해 왕세자는 궁궐을 나와야 하며, 성균관에 도착한 다음에는 왕세자로서의 지위를 일시적으로 상실한다. &#034;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 왕세자 입학식이 거행될 때 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아니라 성균관의 학생이라는 자격에 부합하는 대접을 받았다.&#034; 성균관에서 학생으로서의 예를 거행한 다음 왕세자는 다시 궁궐로 돌아가 왕세자의 자격을 되찾지만 성균관에서의 예를 거침으로써 그는 유가적 이상을 실현할 군왕으로서의 의무를 상징적으로 부여받은, 거듭난 왕세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으로서의 왕세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두가지를 통해서이다. 하나는 성균관에 도착한 왕세자가 익선관과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복장보다도 더 강한 상징적 행위인데, 왕세자가 명륜당(明倫堂)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034;스승은 책상 위에 책을 펴놓고 강의를 하며, 왕세자는 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았다. 스승이 동쪽에 앉아 책상을 사용하는 반면에 왕세자는 서쪽에 꿇어앉아 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스승이 왕세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하는 의식이다.&#034; &#034;이러한 의식은 장차 왕 위에 오를 왕세자일지라도 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스승에 대한 예절을 지켜야 하며, 이런 수련을 통해서 학문과 덕망을 갖춘 성군(聖君)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034;</p>
<p>왕세자가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국왕에 의해 시비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1625년 인조는 왕세자 입학식을 거행하면서 왕세자가 사용할 책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였지만 예조는 이에 반대했다. 예조의 반대는 다음과 같았다: &#034;입학례의 성대한 의식은 한 나라의 최대 경사입니다. 조종 조에는 이미 내려오는 절목이 있는데, 책상은 박사 앞에 두고 세자는 자리만 깔고 책을 받는 것으로 스승과 생도의 예를 실천합니다. 이는 실로 옛 입학례의 제도를 본받은 것입니다. 책상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034; 효종은 왕세자인 헌종의 입학례 때 &#034;어째서 스스로 낮추는 예 때문에 경전을 바닥에 놓는단 말인가&#034;라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경전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들어 왕세자가 바닥에 엎드리는 일을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는 완강했다. 그들은 &#034;스승과 제자의 예&#034;를 우선했기 때문이다.</p>
<p>왕세자가 궁궐이 아닌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른 것에는 또다른 시사점이 있다. 왕세자는 궁궐에서 생활하고 그에 대한 교육은 궁궐에서 행해진다. 이 교육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시강관들이 수행한다. &#034;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학습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왕세자 한 사람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20명의 시강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이 아니라 궁궐 안에서 국왕을 키우는 세자시강원이었다.&#034; 이처럼 세자시강원이 있는데도 굳이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생으로서의 지위를 자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물론 성균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입학례가 성균관에 의해 주도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034;입학식에서 스승이 되는 박사는 성균관의 직임을 가진 대제학이 담당했고&#8230; [여러] 역할도 모두 성균관의 유생이 담당했다. 이처럼 성균관이 주도하는 입학식에서 조정의 유력자가 끼어들려고 하면 성균관 쪽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034; 이 원칙을 훼손하려는 국왕의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번번히 좌절되었다. 성균관은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인데 여기서는 국립대학이라해도 정치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궁궐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은 것이다. 정치와 학문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조선에서도 사정은 이러했던 것이다.</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C%99%95%EC%84%B8%EC%9E%90%EC%9D%98+%EC%9E%85%ED%95%99%EC%8B%9D,+http://allestelle.net/?p=1599"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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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책 몇 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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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8 Feb 2010 18:53:07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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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프란시스코 바렐라(지음), 유권종,박충식(옮김), &#60;&#60;윤리적 노하우&#62;&#62;, 갈무리, 2009. [9788961950220]
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039;근대성은 동아시아인이 성취해야 할 이상인가&#039;라는 의문이 머리 속에서 오고갔다. 
스승인 마뚜라나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학자이다. 여기서 &#039;학자&#039;라고 한 것은 그의 전문 분야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지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강연을 묶고 거기에 해설을 붙인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프란시스코 바렐라(지음), 유권종,박충식(옮김), &lt;&lt;윤리적 노하우&gt;&gt;, 갈무리, 2009. [9788961950220]</strong></p>
<p>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039;근대성은 동아시아인이 성취해야 할 이상인가&#039;라는 의문이 머리 속에서 오고갔다. </p>
<p>스승인 마뚜라나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학자이다. 여기서 &#039;학자&#039;라고 한 것은 그의 전문 분야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지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강연을 묶고 거기에 해설을 붙인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윤리적 행위의 핵심이 &#034;추론(reasoning)&#034;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숙련된 행동(ethical expertise)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윤리적인 행동을 자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미리 만들어진 일종의 선험적 자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 개의 강의 중 첫번째 것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인지과학에서 끌어오고 두번째와 세번째 것은 맹자, 티벳 불교, 노자 등의 사상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가져오고 있다. 이 강의들을 다 읽으면 윤리적으로 숙련된 현자(the wise)는 오랜 수신을 통해 형성된 품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람, 교훈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 경향에 따라 행위하는 사람, 무의식적 자발성과 이성적 계산 사이의 중도(中道)를 걷는 사람이라는 귀결에 이른다. </p>
<p>이러한 귀결의 가장 밑바탕에 놓인 것은 지식에 대한 규정이다. 해설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구체적이고 체화된 것이고, 통합적이며,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일반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때 우리가 얻게 되는 지식은 구체적인 것이며, 인지는 신체의 감각에 의존하고 이 감각운동은 포괄적인 생물학적,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화된 것이며, 신체적 경험의 구조화된 본성에 기반을 두고 신체의 상호작용에 의한 경험들의 구조화된 측면들로부터 개념적 구조들까지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통합적이며, 지각은 미리 주어진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운동의 능력과 분리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행동이 유도하는 지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에따라 상위의 인지구조 역시 반복되는 행동의 유형으로부터 창발된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것이다. </p>
<p>바렐라의 논의를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의 구성주의부터 시작하여 후설, 메를로-퐁티, 비트겐슈타인은 물론 근대 서구 철학의 거장들을 거의 다 읽어야 하겠지만 &#8212; 이 책의 역자해제는 그것을 암묵적으로 권하고 있다 &#8212; 이 책으로부터는 그것을 얻어낼 수 없으니 국내에 이미 출간된 다른 도서목록이 요구된다. 역자해제에서 이것이 제시되었어야 했다.</p>
<p><strong>카이즈카 시게키(具塚茂樹)(지음), 김석근(옮김), &lt;&lt;제자백가: 중국고대의 사상가들&gt;&gt;, 까치, 1989.</strong></p>
<p>절판된 책이지만 다시 찾아 읽어볼 가치가 있다. </p>
<p>&#034;겨우 2세기 반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034; 중국사상사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전국시대의 사상가들, 즉 묵자, 노자, 장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을 다룬다. 중국 고전 공부하면 떠오르는 고리타분한 문헌 고증과 자구 해석이 아닌 시대적인 배경을 논하면서 그들 사이의 논쟁 등을 가볍게 다루어 나간다. 그렇다고해서 난삽한 뒷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옮긴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034;이 책을 통해서 제자백가 사상의 개략적인 윤곽을 더듬은 다음 직접 원전을 통한, 제자백가 사상의 좀더 깊은 이해에로 나아가는&#034; 순서의 맨 앞자리에 놓을만한 책이다.</p>
<p><strong>이해영(지음), &lt;&lt;전국시대 비판철학&gt;&gt;, 문사철, 2008. [9788996119326]</strong></p>
<p>카이즈카 시게키의 책에서 &#034;개략적인 윤곽을 더듬은&#034; 다음에 손에 집어들 수 있는 책이다. </p>
<p>사상에 대한 이해는 문헌을 꼼꼼하게 읽는 것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다. 사상의 맥락을 따져 묻지 않으면 사상은 보편적인 유물로 전수되기만 할 뿐 생동성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지혜를 가져다 주지도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039;중국 사상&#039;이라 부르는 것들을 이해하려면 &#039;오늘날의 중국&#039; &#8212; 이것은 사상의 이해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8212; 이 아닌 그것의 원형이 배태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들여다 볼 때에만 가능하다. 저자의 말처럼 &#034;전국시대는 격동하는 역사의 전환기&#034;였으며, &#034;전 중국의 통일과 평화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시대정신이 간절히 필요하였다.&#034; 그런데 &#034;당시의 지식인 집단인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처한 입장에 따라 시대를 달리 진단하였다. 진단한 내용이 달랐으므로 당연히 처방의 내용도 달랐다.&#034; 저자가 제자백가의 사상을 잘라낸 단면은 바로 사상가들이 &#034;처한 입장&#034;이다. 다시 말해서 전국시대라는 가장 큰 범위의 사회경제적 상황, 각 사상가가 대변하던 집단과 계층, 그에 따른 정책 처방이거니와, 저자는 자신이 자른 단면을 루시엥 골드만의 &lt;&lt;인문과학과 철학&gt;&gt;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034;어떤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할 때 그와 대비되는 학설 및 하부구조와 그 사상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의 상이한 해석 및 그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결정지은 경제적.사회적 조건과 대립시켜 본다면 그 사상은 더욱 잘 이해된다.&#034; 우리는 이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각으로 중국 고대 사상을 논의하는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어 있지만 이 책은 그 모든 독서의 집약이자 안내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p>
<p>먼저 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보자. 이 시대는 노예제 국가에서 봉건전제 국가로의 전환기였다. 귀족들이 대를 이어 누리던 지위와 봉록이 폐지되고 특권이 박탈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두된 핵심적인 과제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때는 어김없이 토지가 근본적인 요소로서 등장한다. 어쨌든 &#034;전국시대 초.중기 100여 년 간의 변법운동을 통해 종족 노예주 귀족의 토지와 관직에 대한 특권이 폐지되었다. 신흥지주계급은 완비된 관료 제도를 마련하고 방대한 군대를 갖추어 권력이 군주에게 집중된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관료제 정권을 형성하게 되었다.&#034; 이 과정에서는 &#034;봉건제의 확립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고, 상업과 도시도 흥기&#034;하였다. 철제 농구의 사용과 우경(牛耕), 수리시설과 관개시설의 개선, 단위면적당 생산량 확대, 금속화폐의 보급, 상업과 도시의 발달과 같은 고대 중국사의 상식적인 사실이 사상과 연결되는 지점은 계급관계에 있다. 지주계급은 봉건왕족, 공훈지주, 관료지주, 회민지주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자영농, 개인수공업자, 고용노동자 등과 같은 피지배계급과 정립관계에 놓였다. 여기서 &#034;지식인은 하나의 독특한 계층을 형성&#034;하는데 그들은 &#034;어느 특정한 계급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급에 복무하는가에 따라 계급 속성이 결정되었다.&#034; 따라서 우리가 전국시대의 지식인을 살펴볼 때에는 그가 &#034;어떤 계급에 복무하는가&#034;를 중요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p>
<p>저자가 다루고 있는 유가, 묵가, 장자, 순자의 사상은 인간의 도덕의식이라는 당위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 생산노동과 실용성을 강조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대중의 공동이익과 정치적.경제적 평등, 자연적 본성만을 참된 것으로 봄으로써 이르게 되는 주관의 자유, 사상의 종합적 통일 등으로써 집약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사상은 다양한 요소들의 접합으로서 등장한 것이요, 특히 지식인 자신이 처한 입장을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서 이 사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p>
<p>맹자의 정치론은 기본적으로 민심의 향배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039;민본주의자&#039;로 불린다. &#034;민심의 향배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고 백성이 국가존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점에서 맹자의 사상을 민본주의라고 보는 데 큰 무리는 없&#034;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에게 있어 백성은 항상 대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034;백성의 동향이란 오로지 비주체적인 것들의 동향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위정자의 시혜 여부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034; 또한 맹자는 &#034;토지를 생산자에게 고르게 분배하고 벼슬하는 자의 봉록을 안정적으로 확보&#034;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한다. 이는 &#034;민생을 위한 일정한 생업의 확보[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자 맹자의 사(士)로서의 현실적 자기확보&#034;이기도 하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034;온건한 개량주의 형식으로 당시의 구귀족계급과 타협하고자 하는 구귀족전화 지주계급의 이익을 반영&#034;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소생산자 전화 지주계급을 대표하며 철저히 귀족계급의 세습특권을 박탈할 것을 주장하는 법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맹자가 말하는 &#039;사&#039;이다. 맹자는 노심(勞心)과 노력(努力)을 구분하는 분업론을 제시하였는데, 전자를 사의 임무로 보았다. 성왕(聖王)의 인재등용과 오륜(五倫)의 교육, 즉 &#034;군주에게 등용되어 그를 보좌하고 민에게는 도덕을 교육하여 물질적 재화를 공급&#034;받는 자신의 처지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034;맹자의 계급의식의 소산만은 아니다. 계급모순을 기초로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반영&#034;인 것이다.</p>
<p>장자의 사상은 &#034;구질서에서 신질서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외된 일군의 몰락귀족, 소사유 농민 등 일종의 자유민 계층의 현실관이 반영&#034;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사상에서 민은 대상이 아니다. 장자가 생각하는 &#034;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은 인의와 같은 도덕이념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삶의 욕구로서의 본성이 객관적 필연성인 상황[시명(時命)]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다.&#034; 장자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현실상황에 따른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034;시대상황과 처한 입장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도덕이념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백성에게 강요하는 허위의식의 지배층&#034;의 사상과 태도인 것이다. 장자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집약된 말은 &#034;도는 없는 곳이 없다&#034;는 도편재설(道遍在說)이다. 이는 &#034;도가 구체적 현상을 초월해 있는 어떤 근원자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객관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적 법칙&#034;임을 의미한다. 이의 구체적인 성격은 주(周), 편(偏), 함(咸)의 세 단어로써 규정할 수 있는데, 각각은 &#034;보편공통성&#034;, &#034;보편평등성&#034;, &#034;보편타당성&#034;을 뜻한다. 장자는 도의 편재와 그에 따른 상황유연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의 한계는 계급적 한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 사상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034;소생산자 계층의 첨예한 비판의식은 그들이 지니는 계급적 기반과 역량으로는 현실을 개혁할 수 없었다는 한계성 때문에 결국 현실에는 소극적이면서도 개인의 정신적 자유에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자의 정신적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자연과 사회의 객관필연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목적을 지니고 의식적으로 개조.변혁하는 실천활동을 전개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이다.&#034; 장자는 물론 노자의 사상, 즉 도가 일반의 사상을 읽을때 느껴지는 개운함과 일종의 허전함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p>
<p>묵자는 유가나 도가와 달리 중국의 역사 속에서 급속하게 소멸했다. 그 까닭은 &#034;유교가 한대 이후 봉건 왕조의 체제이념이 되어 정통사상의 지위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유가의 의식기반인 종족의식을 거부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묵가의 사상이 이단으로 배척되었다는 데 있다&#8230; 진한 이후 중앙집권 봉건통일왕조 체제가 확립된 후로 존립의 터전을 잃었던 것이다.&#034; 묵가 소멸의 주된 원인에서 우리는 묵가 사상의 성립과정과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전국시대는 신흥지주계층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런데 이 &#034;질서에서 소외된 대중들은 대부분 정치참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경제적 이익도 수탈당하였다. 도시의 소수 수공업 생산자 중심의 묵가는 이러한 소외대중의 입장에서 정치참여 기회의 균등과 경제적 이익의 균분을 주장하였다.&#034; 이러한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전쟁을 부정[非攻]하고 절용주의[節葬, 節用, 非樂]를 주창하였다. 그런데 유가는 음악을 중시하고 장례를 후히 치를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한 사회계층의 관점에서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제거되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유가와 묵가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대립하였다. &#034;유가는 묵가가 지녔던 개인적 신의를 기초로 하는 &#039;협(俠)&#039;의 정신보다는 귀족 중심의 종법사회에서 유래하는 가족도덕의 실천을 중시&#034;하였는데, 이는 종족적 사상기반과 소사유수공업자 중심의 공리적 계약관계라는 사상기반의 충돌이기도 한 것이다. </p>
<p>마지막으로 순자를 살펴보면 그는 &#034;당시 강화되어가던 군주의 권력, 중국의 통일 전망이라는 현실을 반영해서 예를 실천하는 군주를 통해 민생의 안정과 계층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안정된 사회의 질서를 바랐지만 권력이란 언제나 백성에 대한 억압이 본질이고 따라서 그의 사회적 분별에 의한 질서구도도 역사적으로 결국은 억압의 구도로 전개될 수밖에 없&#034;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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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유원, &#039;200자 원고지 30매&#039;</title>
		<link>http://allestelle.net/?p=1591</link>
		<comments>http://allestelle.net/?p=1591#comments</comments>
		<pubDate>Tue, 22 Dec 2009 17:14:36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특강/기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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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잡지, &#60;우리교육&#62; 기고글, &#039;200자 원고지 30매&#039; 묶음
2008. 8 - 2009. 11
Script File Download: uriedu_2008-2009.pdf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잡지, &lt;우리교육&gt; 기고글, &#039;200자 원고지 30매&#039; 묶음<br />
2008. 8 - 2009. 11</p>
<p>Script File Download: <a href='http://allestelle.net/wp-content/uploads/2009/12/uriedu_2008-2009.pdf'>uriedu_2008-2009.pdf</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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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이명훈, 아리스토텔레스, &#60;&#60;영혼론&#62;&#62; 강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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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7 Dec 2009 06:15:16 +0000</pubDate>
		<dc:creator>이명훈</dc:creator>
		
		<category><![CDATA[고전 및 철학 강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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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0. 원전과 참고문헌
* 원전 및 주석
De Anima, Aristotle, S. D. Ross, Oxford, Clarendon Press, 1961.
* 원전 및 번역
On the Soul, Aristotle, W.S. Hett, The Loeb Classical series v. 23, Harvard Univ. Press, 1936.
* 번역 및 주석
De L&#039;Ame, Aristote, J. Tricot,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1982.
* 영어 번역본(Internet Classic Archive, J.A. Smith 번역본)
http://classics.mit.edu/Aristotle/soul.html
* 참고문헌
Essays on Aristotle&#039;s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0. 원전과 참고문헌</p>
<p>* <strong>원전 및 주석</strong><br />
<em>De Anima</em>, Aristotle, S. D. Ross, Oxford, Clarendon Press, 1961.</p>
<p>* <strong>원전 및 번역</strong><br />
<em>On the Soul</em>, Aristotle, W.S. Hett, The Loeb Classical series v. 23, Harvard Univ. Press, 1936.</p>
<p>* <strong>번역 및 주석</strong><br />
<em>De L&#039;Ame</em>, Aristote, J. Tricot,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1982.</p>
<p>* 영어 번역본(Internet Classic Archive, J.A. Smith 번역본)<br />
<a href="http://classics.mit.edu/Aristotle/soul.html">http://classics.mit.edu/Aristotle/soul.html</a></p>
<p>* <strong>참고문헌</strong><br />
<em>Essays on Aristotle&#039;s De anima</em> / edited by Martha C. Nussbaum and Amélie Oksenberg Rorty Clarendon Press ; Oxford University Press, 2003.</p>
<p><em>Aristotle&#039;s De anima</em> / Ronald Polansk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2007.</p>
<p><em>De l&#039;ame = Peri psyches</em> (romanized) = <em>De anima</em> (romanized) / Aristote; trad. nouv. et notes par J. Tricot J. Vrin, 1992.</p>
<p><em>De anima</em> : books II and III with passages from book 1 / Aristotle ;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D.W. Hamlyn ; with a report on recent work and a revised bibliography by Christopher Shields Clarendon Press ; Oxford University Press 1993.</p>
<p><em>Aristotle&#039;s De anima in focus</em> / [edited by] Michael Durrant Routledge, 1993.</p>
<p><em>Aristotle&#039;s De anima</em> / tr.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D. W. Hamlyn Clarendon, c1989.</p>
<p><em>On Aristotle on the soul 1.1-2</em> / Philoponus ; translated by Philip van der Eijk Duckworth, c2005.</p>
<p><em>On Aristotle&#039;s &#034;On the soul 3.9-13&#034;</em> / [attributed to] &#039;Philoponus&#039;. With On Aristotle&#039;s &#034;On interpretation&#034; / Stephanus ; translated by William Charlt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p>
<p><em>Averroës Middle commentary on Aristotle&#039;s De anima : a critical edition of the Arabic text</em> / Averroës ; with English translation, notes, and introduction by Alfred L. Ivry Brigham Young University Press, 2002.</p>
<p><em>On Aristotle&#039;s &#034;On the soul 3.1-8&#034;</em> / [attributed to] &#039;Philoponus&#039;; translated by William Charlt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p>
<p><em>On Aristotle&#039;s &#034;On the Soul 3.1-5&#034;</em> / Simplicius ; translated by H.J. Blumenthal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p>
<p><em>Commentary on Aristotle&#039;s De anima</em> / St. Thomas Aquinas ; translated by Kenelm Foster and Silvester Humphries ; introduction by Ralph McInerny Dumb Ox Books, c1994.</p>
<p>1. 영혼 탐구의 중요성과 난점, 영혼론의 제문제<br />
Script File Download: <a href="http://allestelle.net/wp-content/uploads/2009/08/anima_01.pdf">anima_01.pdf</a></p>
<p>2. 선대이론(1)<br />
Script File Download: <a href="http://allestelle.net/wp-content/uploads/2009/08/anima_02.pdf">anima_02.pdf</a></p>
<p>3. 선대이론(2)<br />
Script File Download: <a href="http://allestelle.net/wp-content/uploads/2009/12/anima_03.pdf">anima_03.pdf</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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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시간과의 경쟁</title>
		<link>http://allestelle.net/?p=1583</link>
		<comments>http://allestelle.net/?p=1583#comments</comments>
		<pubDate>Sun, 06 Dec 2009 08:27:17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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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민두기(지음), &#60;&#60;시간과의 경쟁&#62;&#62;,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1판 2쇄. [9788971415443]
1
&#60;&#60;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62;&#62;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형성된 개념들을 다룬다. &#60;&#60;일본의 군대&#62;&#62;, &#60;&#60;만주국의 탄생과 유산&#62;&#62;도 같은 시대를 탐구대상으로 한다. &#039;동아시아&#039;, &#039;근대&#039; 등이 이 책들을 관통하는 술어들이다. 동아시아사를 연구한 한국의 역사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조망하고 있을까? 2000년에 작고한 민두기 교수의 책은 이 물음때문에 읽었다. 세세한 역사적 실증보다는 노대가의 통찰로써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민두기(지음), &lt;&lt;시간과의 경쟁&gt;&gt;,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1판 2쇄. [9788971415443]</strong></p>
<p>1<br />
&lt;&lt;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gt;&gt;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형성된 개념들을 다룬다. &lt;&lt;일본의 군대&gt;&gt;, &lt;&lt;만주국의 탄생과 유산&gt;&gt;도 같은 시대를 탐구대상으로 한다. &#039;동아시아&#039;, &#039;근대&#039; 등이 이 책들을 관통하는 술어들이다. 동아시아사를 연구한 한국의 역사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조망하고 있을까? 2000년에 작고한 민두기 교수의 책은 이 물음때문에 읽었다. 세세한 역사적 실증보다는 노대가의 통찰로써 일종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학적인 유산에 관한 평가는 내 능력 밖이고, 학문외적 잔여에 대한 소회는 거론이 마땅치 않다.</p>
<p>이 책에서는 책 제목이기도 한 &#034;시간과의 경쟁&#034;과 &#034;19세기 후반 조선 왕조의 대외 위기의식&#034;만을 집중 독서하였다. 전자는 역사론에 가깝고 후자는 아주 협소한 범위의 사건을 다루고 있어 서로 대비된다.</p>
<p>2<br />
&#034;시간과의 경쟁&#034;은 20세기 동아시아 &#8212; 특히 중국과 일본 &#8212; 의 변화에 대해 아주 개괄적으로 논한다. 범위가 무척이나 넓어서 조밀함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성김이 내가 원한 것이다. 천변만화하는 이른바 &#039;격동&#039;의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은 그러한 유유함에서만 얼핏이라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드러냄은 삶과 공부를 회고하며 정리하는 노교수에게서 문득 흘러나오는 한마디에서 얻어들을 수 있는 것이지 세속적 경력과 공명을 추구하는 젊은 역사학도에게서는 발현되지 않는다.</p>
<p>필자에 따르면 &#034;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8230; 중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034; 이 두 나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주축이다. 달러가 유일의 기축통화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른바 다축통화가 거론되는 시기에 다섯 안에 들어가는 통화를 운용하는 나라들이 되어 이제는 세계의 주축으로까지 발돋움하였다. 20개 나라가 돌아가면서 맡는 G20 의장국 순서가 되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한국은 여전히 섬돌 아래에 있다. 이것이 국제적 현실이건만 이것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19세기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 정보부족이 아닌 정보를 파악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p>
<p>어쨌든 이들 두 나라가 21세기 세계의 주축 대열에 끼게 된 것은 20세기의 우여곡절을 겪어오면서도 뭔가를 잘 갈무리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경과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필자에 의하면  이 두나라는 &#034;그 시대적 과제를 추구함에 있어 몹시 조급하여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했었다.&#034; 중국은 &#034;亡國이라는 위험을 다급히 제거해야&#034; 했고, 일본은 &#034;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 침략의 수단을 조급하게 그리고 절제없이 사용하였다.&#034; 조급증은 정치권력에게 편중된 힘이다. 그 힘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자신의 영역을 넘어 &#034;본래 자율적이어야 할 사회적.문화적 변화에게까지 크게 작용&#034;한다. &#034;이것 역시 동아시아 역사 발전의 주된 특색의 하나이다.&#034; 조급함 &#8212; 이는 당연히 경계해야겠지만 한 나라의 성원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갈 때에는 막아서며 나서는 이도 없고, 설혹 누가 물길 가운데로 걸어간다해도 물결이 그를 휘감아 버리고 만다. 그러하니 여기서 정확한 인도를 기대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도의 결핍은 그 공동체에는 물론이요 주변국과 세계에게도 재난을 가져온다. 20세기 전반기에 발병했던 일본의 조급증이 바로 이러한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조급증이 최소한 한 공동체에게 여간해선 회복하기 어려운 재난을 가져온다는 점을 감지해 두어야겠다. 역사의 전개는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인간의 발원(發願)과 그에 이은 유위(有爲)를 아무리 쌓아도 때가 차지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조급함은 &#034;역사 전개의 비정상을 초래&#034;한다는 것, 이것이 역사에서 도출되는 메타역사적 전갈인 것이다.</p>
<p>이 논문은 말미에 &#039;결론&#039;이 아닌 &#034;餘論&#034;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034;19세기 그리고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최대.최악의 질병이었던 아편 흡식의 풍습&#034;을 정치적.권력적 차원의 힘과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사례로서 거론한다. 아편 흡식은 누가 보아도 못된 풍습이다. 따라서 그것을 퇴치하려는 &#034;拒毒運動&#034;이 꾸준히 전개되었으나 정치권력은 &#034;재정적 急需를 메울 아편의 換金性이란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아편 흡식 근절은 불가능하였다.&#034; 여기에는 각 지방의 군벌, 국민당 정권, 연안(延安)의 공산당 정권, 일본 침략자들까지 예외없이 가담하였다. &#034;1949년 이후에 가서야 아편 흡식의 악습이 제거된 것은 중공 정권의 강력한 침투력과 의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편의 환금성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034; 필자는 이 사태를 두고 &#034;20세기사에서의 특기할만한 사회적 변화임이 분명하다&#034;고 평가한다.</p>
<p>결론이 아닌 &#034;餘論&#034;은 사유의 비약을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이는 정치와 문화의 연결에 이러한 비약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아편 흡식은 절연키 어려운 습관이다. 개인의 삶을 병들게 하고 국망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의 흡식과 절연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와 결단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그것의 사회적 유통에는 필경 정치적 요소가 관여되어 있으며, 특히나 그것의 환금성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결정적이다.<sup>1)</sup> 따라서 아편 흡식을 둘러싸고 100여년에 걸쳐 일어난 사태에서 우리는 몹시 고약한 습속이라해도 그것을 조장하고 끊어내는 근원적인 힘은 정치권력이 쥐고 있다는 것, 그것은 경제적 요인을 매개로 개인과 사회로 관철된다는 것, 환금되는 것이 달라지거나 환금의 방식이 전혀 새로워짐으로써 습속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는 21세기에 살아갈 이들이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034;20세기사에서의 특기할 사회적 변화&#034;인 것이다.</p>
<p>3<br />
&#034;19세기 후반 조선 왕조의 대외 위기의식&#034;은 1, 2차에 걸친 중영전쟁<sup>2)</sup>을 논의 배경으로 삼는다.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던 중국에 대한 영국의 침입을 실마리로 삼는 까닭이 논문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034;동아시아 근대화의 전개 양상은 19세기 후반 근대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 양태의 차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서양의 군사적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그에 대응하려고 하였는가가 잘 밝혀져야 근대화 과정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인을 보다 잘 알 수 있는 것이다.&#034; 우리는 일반으로 한국 근대화의 시작을 다양한 요인들로써 탐구한다. 이를테면 &lt;&lt;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gt;&gt;는 &#039;문명&#039;, &#039;권력&#039;, &#039;주권&#039;, &#039;부국강병&#039;, &#039;세력 균형&#039;, &#039;민주주의&#039; 등의 개념이 도입되고 한국에서 변천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는데, 이 개념들은 한국이 서구와 접촉한 어떤 사태들을 표상하고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이차적인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개념들만 보아서는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가 시발점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우리에게 &#034;군사적 위협&#034;과 &#034;그에 대한 대응양태&#034;를 살펴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p>
<p>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조선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는 주로 조선에 대한 직접적 침략인 &#034;1866년의 불란서 함대의 공격 이후&#034;가 다루어져왔다. 그런 점에서 1840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시기에 두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검토하는 것은 이후 직접적인 침입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조선에 대한 서양세력의 직접적인 침략이 조선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조선은 중영전쟁의 경과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고, 그에따라 적절한 대책을 세울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후 벌어진 불란서 함대의 공격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불비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034;조선 왕조의 반응을 성격지우는 것은 결코 정보 자체의 부족일 수는 없고 조선 왕조 스스로의 정보 평가 능력이나 조선 왕조가 처해 있는 상황일 수밖에 없게 된다&#034;는 필자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어느 시대이건 외교적 현안에 대한 반응과 대책에서 정보의 양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034;정보 평가 능력&#034;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p>
<p>1차 중영전쟁은 통상(通商)요구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전쟁에 패함으로써 영국에게 통상을 허락하였다. 이 패전이 조선에게는 &#034;통치권의 상실 같은 사태를 수반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패전&#034;으로 보였고, 그에따라 &#034;이 전쟁의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흔적은 없다.&#034; &#034;제1차 중영전쟁이 &#039;직접적으로&#039; 미친 영향으로서는 아편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들 수&#034; 있을 정도다. 2차 중영전쟁이 종결되면서 북경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034;&#039;大英&#039;, &#039;大法&#039;, &#039;俄羅斯&#039;, &#039;亞美理&#039;의 洋夷와 新約을 맺어 천주교 전수 학습을 금하지 않고 보호&#034;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내용을 공식확인한 뒤 조선 조정에서는 중신들의 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국왕 철종은 대신들에게 대비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국왕의 촉구에는 사태 인식의 일단이 들어있다: &#034;燕京이 위태로우면 우리나라라고 어찌 편안하겠는가. 또한 그들이 講和라고 한 것(조건)에는 단지 교역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다. 倫常을 없애고 손상시키는 術을(즉 기독교를 지칭함) 四海에 전염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그 害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034; 여기서 왕의 관심의 &#034;초점은 나라가 점령된다든가 하는 것보다는 西洋諸國이 군사적으로 기독교 포교를 조선에도 강요해 오면 어찌할 것인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034; 중영전쟁의 핵심은 군사적 침입인데, 그것은 도외시한채 사술(邪術)의 전염을 중시하게 되면 대응은 군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034;북경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이 동요하여 朝臣 가운데도 시골로 낙향해 버리는 사람이 생길 정도&#034;였는데도 조선은 군사적인 방책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의식은 &#034;대내적인 自修의 강조로 나타났다. 自修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군주의 도덕적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에 달한 민생의 어려움, 행정의 무능. 부패 등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었다. 대외 위기의 실체를 탐색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직접 대응의 형태로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내수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조정의 국왕이나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중신들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034;</p>
<p>4<br />
대외위기에 대한 대응은 사태에 대한 객관적 정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보를 다루는 태도이다. 19세기말 중영전쟁에 대한 조선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덧붙여 둘 수 있는 것은 1602년에 마테오 리치와 이지조가 함께 만든 &#039;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039;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태도이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도 필사되고 목판 인쇄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1708년(숙종 34년) 관상감에서 제작한 &#039;곤여도병풍&#039;이다. 마테오 리치는 이 지도를 만들면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이 타파될 계기가 마련될 것을 기대하였으니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 지도를 통해 그러한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화이론적 문화심성이 과학적 세계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034;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을 알았지만 중화론적 문화심성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근대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정치군사적 권력의 매개를 필요로 했다.&#034;<sup>3)</sup> 그런 점에서 조선이 근대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들은 이 논문이 시사하고 있듯이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들이라 할 수 있겠다.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받은 것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조급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도 뭔가 남겨둘 수는 있었다. 조선은 조급하지도 남겨두지도 못했다.</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C%8B%9C%EA%B0%84%EA%B3%BC%EC%9D%98+%EA%B2%BD%EC%9F%81,+http://allestelle.net/?p=1583"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ol class="footnotes"><li id="footnote_0_1583" class="footnote">근자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아편밀매를 통해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보고가 있으며 강대국의 비밀정보기관이 마약사업에 관여했다(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에 관해서는 &lt;&lt;국경없는 조폭 맥마피아&gt;&gt; 참조.</li><li id="footnote_1_1583" class="footnote">1840-1842의 1차 중영전쟁은 &#039;아편전쟁&#039;이라고도 불리며, 1856-1860의 2차 중영전쟁은 &#039;애로우호 전쟁&#039;이라고도 불린다</li><li id="footnote_2_1583" class="footnote">장인성, &lt;&lt;근대한국의 국제관념에 나타난 도덕과 권력&gt;&gt;, p. 21, 각주2.</li></ol>]]></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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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책 몇 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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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8 Nov 2009 18:04:46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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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오카베 마키오(지음), 최혜주(옮김), &#60;&#60;만주국의 탄생과 유산&#62;&#62;, 어문학사, 2009.[9788961840804]
강정인 외(지음), &#60;&#60;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62;&#62;, 후마니타스, 2009.
박종기(지음), &#60;&#60;새로 쓴 5백년 고려사&#62;&#62;, 푸른역사, 2009. 초판 3쇄[9788991510647]
1
다섯 명의 필자들이 쓴 글을 묶은 &#60;&#60;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62;&#62;은 &#034;&#034;&#039;민주화&#039;를 중심으로 본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전개: 한국 현대와 서구 근대의 만남&#034;이라는 제목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 동안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의 민주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오카베 마키오(지음), 최혜주(옮김), &lt;&lt;만주국의 탄생과 유산&gt;&gt;, 어문학사, 2009.[9788961840804]<br />
강정인 외(지음), &lt;&lt;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gt;&gt;, 후마니타스, 2009.<br />
박종기(지음), &lt;&lt;새로 쓴 5백년 고려사&gt;&gt;, 푸른역사, 2009. 초판 3쇄[9788991510647]</p>
<p>1<br />
다섯 명의 필자들이 쓴 글을 묶은 &lt;&lt;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gt;&gt;은 &#034;&#034;&#039;민주화&#039;를 중심으로 본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전개: 한국 현대와 서구 근대의 만남&#034;이라는 제목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 동안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의 민주화 연구팀이 수행한 기초 연구 결과 가운데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034; &#039;학진 프로젝트&#039;로 수행된 것이므로 내용의 부실함이 넉넉히 짐작되며 &#034;기초 연구 결과&#034;인 까닭에 자료집 차원의 정리임을 예상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수행하고 그로부터 사유자와 행위자 모두에 의해 &#039;사유된 것(사상(思想) Gedanken)&#039;을 도출한 뒤, 그것을 &#034;서구 근대&#034;의 &#034;이념&#034;과 대조하여 독자적 성격을 밝혀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나, 강정인이 쓴 글인 첫번째 챕터 &#034;보수주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그리고 모호한 정상화&#034;는 &#034;사상&#034;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일독할만한 이유가 조금은 있다.</p>
<p>2<br />
보수주의와 급진주의는 이념의 구체적 내용에 따라 실체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및 다른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만 규정되는 상대적 이데올로기이다. 특히 보수주의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지킬 것이 있는 집단에게만 생겨난다.<sup>1)</sup> 그러므로 한국 현대사에서의 보수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2009년 현재 보수주의자를 자칭하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들의 속성을 규준으로 삼아 이전 시대로 소급해들어가서는 안된다. 틀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보수주의에 대한 후대의 규준으로써 논의의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정인의 논의는 실패했다. 당대의 맥락에서 보수주의의 현상형태들을 기술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제현상을 정립한 뒤, 상대적으로 보수의 위상에 자리잡은 것을 지적하면 보수주의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럽 근대의 보수주의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근대적 질서를 체계적 이론적으로 옹호하려는 노력의 결실로서 등장한 것이요, 그에 대응하는 프랑스 혁명가들의 주장은 급진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다시 19세기 중반에는 보수주의로 자리잡은 것이 된다. </p>
<p>그렇다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까? 해방공간에서의 보수주의자들은 누구를 가리킬 수 있겠는가? 그 시기에 &#039;지켜야 할 것&#039;을 가졌던 자들이 누구였는가를 따져보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친일파와 지주들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이 주로 모인 정치집단은 한국민주당이다. 이들 이후에도 지켜야 할 것을 가졌던 자들의 주장을 정리한 다음 그것들에 일관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을 추려내면 한국 정치의 보수주의 이념을 서술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이 챕터에서 공들여 논의되고 있는 서구 보수주의와의 비교는 사실 불필요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서구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라해도 그것이 한국에 들어온 다음에는 일종의 도래물이 되므로 보수가 아닌 진보나 급진의 자리에 놓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p>
<p>2009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박정희를 존숭하는 이들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것, 국가주도의 성장과 개인의 물질적 부의 증진이라는 목표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보수주의자인 것이다.<sup>2)</sup> 그런데 과연 박정희는 보수주의자였는가? 우리는 단호하게 &#039;아니&#039;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sup>3)</sup> 그는 근대주의자였고 급진주의자였다. 박정희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이러한 사실이 있다. 그는 살아 생전에는 급진주의자였는데 죽어서는 보수의 기원이 된 것이다.</p>
<p>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새로워 보이는 일을 벌였다. 그것은 물질생활의 개선, 능력주의, 전통적 신분질서로부터의 탈피<sup>4)</sup> 등이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 사회 근대화 프로젝트의 출발점을 장악한다. 그는 지킬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급진적 근대화 기획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p>
<p>3<br />
박정희는 근대국가 주도의 산업주의를 어디서 배웠을까? 막연하기는 하나 그의 만주군대 경험이 떠오른다. 여기서 우리가 참조해볼 수 있는 자료는 &lt;&lt;일본의 군대&gt;&gt;와 &lt;&lt;만주국의 탄생과 유산&gt;&gt;이다. 후자의 책은 만주에 관한 실증연구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의 &#034;언론계.학계 일부에서는 일본은 만주의 근대화<sup>5)</sup>에 공헌했다고 하는 언설이 유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해 냉철한 실증연구의 입장에서 파시즘기의 일본<sup>6)</sup>의 침략정책을 서술&#034;한 것이다. </p>
<p>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관동군이었으므로 만주국은 분명히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관동군, 만주국 정부,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 관계자들은 &#034;대소전 준비의 경제적 기초&#034;를 준비하기 위해 &#034;광공.농축산.교통통신.이민의 각 부문&#034;에 걸친 &#034;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034;을 수립하였다. 이 5개년 계획에는 만주국 총동원 체제 계획도 들어있었는데 이를 위한 민중동원을 담당한 단체는 만주국 건국이념의 하나인 &#039;오족협화(五族協和)&#039;의 실현을 목표로 삼은 &#034;협화회(協和會)&#034;였다. 또한 만주국은 근대적 계획국가답지 않게 &#039;왕도낙토(王道樂土)&#039;라는 낡은 유가이념을 내세우고 있기도 했다.<sup>7)</sup></p>
<p>만주국은 대만이나 조선과 같은 일본의 기존 식민지와는 역사적 성격이 다른 &#039;독립국&#039;의 모습을 취하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착취받는 곳일 뿐이었다. 물론 &#034;만주국 시기에 [중국]동북의 정치기구나 산업구조가 근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근대화는 동북사회 자신의 역사의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총력전체제의 확립때문이었고, 오히려 동북사회의 자발적 발전을 막는 것&#034;이었다. &#034;동북의 자원과 생산물은 대량으로 일본에 빼앗기고, 증산강행으로 산업설비는 노후화하여, 민중의 노동력은 한계점까지 착취당했다&#8230; 만주국이 남긴 &#039;근대적인 경제기반&#039;은 신중국에서는 가끔 마이너스의 기반일 뿐이었다.&#034; 여기서 우리는 &#039;식민지근대화론&#039;이 허구임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서 만주국을 발견할 수 있다.</p>
<p>4<br />
&lt;&lt;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gt;&gt; 3장은 &#034;민족주의: 한국의 민족주의 형성과 민족주의 이념의 정치&#034;이다. 이 챕터는 민족주의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배세력과 저항세력 모두의 이념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주장을 펼친다. 전자의 사례로는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sup>8)</sup>, 박정희 정권의 영속론적 민족원리<sup>9)</sup>등을 들 수 있겠다. 저항세력의 민족주의는 한일회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을 반민족적 정권으로 규정한다. 그러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039;하나의 민족&#039;이라는 의식은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아주 많은 책이 나왔으니 새삼 목록을 만들기도 귀찮을 정도이다. </p>
<p>&lt;&lt;새로 쓴 5백년 고려사&gt;&gt;는 고려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다. 왜 고려 역사를 읽어야 하는가, 고려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에 유념하고 있다. 성리학 하나로 500년을 이어간 조선과 다양한 이념의 조화로 500년을 이어간 고려와의 비교정리가 초반에 제시되어 &#039;전통&#039;이라면 조선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아주 낯선, 그러나 한반도에서 영위된 삶의 일부였런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039;민족&#039; 개념의 출현에 대해서도 실마리 하나를 던져준다. 이 책에 따르면 &#034;통일신라의 삼국통합은 정치적인 통합에 불과했을 뿐 고구려나 백제의 다양한 인적 자원이나 문화적인 요소를 통합하는 데는 실패&#034;했다. &#034;고려왕조는 삼국시대 말기보다 훨씬 복잡다기한 사회를 실질적으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에 비해 통일왕조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034;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통합을 민족의식 형성의 계기로 이해할 수는 없다. 민족의식은 정치적 문화적 통합은 물론이요 피아(彼我)의 구별까지도 원리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고려를 &#034;궁극적인 민족통합&#034;국가로 말할 때 &#039;민족&#039;은 아주 느슨한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분명하기는 하나 민족의 형성에 요구되는 문화적 제도적 최소장치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통일을 열망하는 이들이 챙겨두어야 할 논의이기도 할 것이다.</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C%B1%85+%EB%AA%87+%EA%B6%8C,+http://allestelle.net/?p=1573"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ol class="footnotes"><li id="footnote_0_1573" class="footnote">그런 점에서 지킬 게 없는 빈털털이들이 &#039;보수화&#039;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짓이며, &#039;뭐든 가진 자는 어떤 의미에서든 보수주의자&#039;라는 말은 상당히 타당하다.</li><li id="footnote_1_1573" class="footnote">여기서 우리는 &#039;박정희주의&#039;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디에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박정희주의자들을 돌아서게 할 수 없다. 근원적인 해법은 그들이 딛고 있는 국가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라는 깊은 뿌리를 뽑아내는데 있다.</li><li id="footnote_2_1573" class="footnote">물론 집권 후반기에는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했던 보수주의자였다.</li><li id="footnote_3_1573" class="footnote">&lt;&lt;그들의 새마을 운동&gt;&gt;에는 새마을 운동 시기에 자신의 본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여성들이 등장하여 과거를 자랑스럽게 회상하는 내용이 있다. 이들이 지금 어떤 정치인을 열렬히 지지하는지는 새삼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li><li id="footnote_4_1573" class="footnote">이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논의와 같은 맥락에서 시도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근대화를 완성한 것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축이었던 일본 제국 군대 출신으로서 만주에서 근무한 박정희가 아닐까 싶다.</li><li id="footnote_5_1573" class="footnote">만주사변에서 1945년 패전까지 14년(만주사변의 전쟁준비기를 넣어 대략 15년)사이&#034;인 15년 전쟁의 기점은 만주사변이며, &#034;이것을 계기로 정치에 대한 군부의 발언권이 증가하고, 이윽고는 군부를 중심으로 파시즘 지배가 확립된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파시즘화에 커다란 징표가 되었다.&#034;</li><li id="footnote_6_1573" class="footnote">&#034;&#039;패도(覇道)&#039;만으로 제국공간이 확장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을때 일본은 제국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고, 여기서 도덕과 권력의 적극적인 결합이 모색되었다. 제국주의자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말한 &#039;왕도적 제국주의(王道的 帝國主義)&#039;였다&#8230; 만주국 건설은 &#039;왕도낙토&#039;의 구현을 표방하였다. &#039;동아신질서&#039;와 &#039;대동아 공영권&#039;의 건설은 &#039;도의&#039;에 기반한다는 점이 반복해서 강조되었다&#8230; &#039;대동아전쟁&#039;은&#8230; &#039;정의 일본의 나아갈 길&#039;로 규정된다.&#034; 장인성, &lt;&lt;근대 한국의 국제 관념에 나타난 도덕과 권력&gt;&gt;, pp. 106-107[9788952107664]</li><li id="footnote_7_1573" class="footnote">이것에 관해서는 아주 긴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챕터에서는 핵심적인 것조차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민주의는 파시즘에 가까운 것이며, 이는 안호상에 의해 정교화되어 박정희 정권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a href="http://orumi.egloos.com/3612537">&#034;유사역사학 태두 중 하나인 안호상, 그는 누구인가?&#034;</a></li><li id="footnote_8_1573" class="footnote">박정희는 급진적 근대주의자이면서도 &#039;국민교육헌장&#039;에는 &#039;민족중흥&#039;이라는 낡은 이념을 끼워넣기도 하였다.</li></ol>]]></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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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유원, 객관적 공동정신의 형성과 도서관의 임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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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6 Nov 2009 03:44:49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특강/기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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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경기도 공공도서관 사서대상 정책세미나 특별강연
2009년 11월25일(수) 오전 10:30-12:00
장소: 경기도 고양시 대화도서관
1
2009년 가을 현재 국무총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정운찬이라는 자(者)가 국회에서 &#039;731부대&#039;에 관한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비웃음을 샀다. 일본제국 군대인 관동군 방역부대, 인간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곳을 모르고 &#039;항일 독립군&#039; 운운 했던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731부대의 나라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경기도 공공도서관 사서대상 정책세미나 특별강연</p>
<p>2009년 11월25일(수) 오전 10:30-12:00<br />
장소: 경기도 고양시 대화도서관</p>
<p>1<br />
2009년 가을 현재 국무총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정운찬이라는 자(者)가 국회에서 &#039;731부대&#039;에 관한 질문에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비웃음을 샀다. 일본제국 군대인 관동군 방역부대, 인간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곳을 모르고 &#039;항일 독립군&#039; 운운 했던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731부대의 나라 일본의 2009년 현재 내각총리대신인 하토야마 유키오이다. 그는 수많은 일본 수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이번에 내놓은 글을 하나 읽으면서 감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앞날을 다시금 생각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글은 &#034;나의 정치철학&#034;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p>
<p>그는 그 글에서 &#034;우애(友愛)&#034;를 정치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034;오로지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켜 본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034; 그런 까닭에 방종에 빠지기 쉬운 &#034;자유와 [획일로 치닫기 마련인]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게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필요&#034;하며 이를 그는 쿠텐호프 칼레르기라는 학자에게서 찾아 &#039;우애&#039;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고, 서민들 등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일이 정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하토야마 유키오는 그런 반론을 예상이나 한듯이 다음과 같을 말로써 자신의 글을 맺고 있다: &#034;세계경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039;우회해야 할 장기적 논의&#039;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가 혼돈스럽고 불투명하며 불안하면 할수록 정치는 높고 큰 목표를 내걸고 국민을 이끌어 가야만 한다.&#034; 이는 모든 정치사상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정치의 목적이다.</p>
<p>오늘날 일본을 아는 이들은, 아니 일본을 잠깐이라도 여행해본 이들은 일본이 전 나라가 골고루 균형있게 발전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전통이 보존되어 있고 그것을 현대의 새로움과 조화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러한 조화가 전국에 걸쳐 있는 것이다. 전통을 잇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039;시니세[노포(老鋪)]라 불리는 회사와 가게들이다. 현재 일본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2만여개에 이른다. 이동전화기 접는 부분에 들어가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쿄토의 다나카 귀금속사는 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이런 회사는 물론이고 쿄토에 가면 음식점도 300년 넘은게 있다. 그리하여 관련 연구자들을 그런 시니세가 10만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최남단 가고시마까지 이런 기업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런 &#039;전통&#039;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다나카 총리가 &#039;국토개조론&#039;을 내걸어 나라 전체를 균형있게 개발하는 장기계획을 세워 시행해왔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이른바 &#039;다초점 국가&#039;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오래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먼 앞날을 내다보는 균형잡힌 미래비전의 제시,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해야할 일이다.</p>
<p>2<br />
정운찬 등장 무렵 벌어진 사건들에서 내 머리에 떠오른 또다른 생각은 공동지식의 부재였다. 분명히 정운찬은 &#039;731부대는 항일독립군&#039;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역사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역사지식의 부재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 사람 잘못일까? 다시 말해서 정운찬의 무식이 정운찬 개인의 식견과 독서가 모자라서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구조적 원인이 있는건 아닐까</p>
<p>한번 생각해보자. 정운찬은 거시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과 교수였다. 한국에서는 경제학과 교수건 학생이건 한국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누가 뭐라하지 않는다. 공부의 과정에서 그걸 배우도록 강요하는 제도도 없다. 정운찬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무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전국의 경제학과 교수들에게 731부대를 아는지, 그걸 아는게 국무총리 자격요건을 구성하는지 물어보자. &#039;아니&#039;라는 대답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정운찬은 재수없이 걸린 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수없음을 말하기 보다는 무지를 탓한다. 왜 그럴까? 한국 사람들의 민족애가 유별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일종의 공동지식의 부재를 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난이 무색하게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것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p>
<p>일제고사 성적이 잘 나오는 초등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 학생의 부모는 분명히 아이를 과고나 외고에 보내려 할 것이다. 이것이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기를 쓰고 일제고사를 고수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과학고 진학 희망이라 해보자. 그 학생은 중학교 1학년까지는 국.영.수.과를 열심히 공부한다. 2학년부터는 수학과 과학만 죽어라고 한다. 사회는 아예 제쳐둔다. 외고가는 학생은 수학, 과학 제쳐둔다. 어쨌든 사회, 역사는 열심히 안한다. 자신의 무지에 무지하다. &#039;무지에의 자각&#039;이 공부의 출발점인데, 그런 자각이 없으니 습득을 다그칠 수도 없다. 이게 외고 교장들이 외쳐대는 &#034;글로벌 인재&#034;의 현상태이다. 무슨 글로벌 인재가 &#039;세계&#039;를 모르나. 이런 자가 외무고시에 봐서 외무부 취직하면 뭘하겠는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사람 만나서 무슨 외교를 하겠나.</p>
<p>이러한 무지는 실용적인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학문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철학은 추상적인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추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논증추리와 분석이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등장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 구체적인 배경은 아테네의 민주정, 스파르타의 과두정, 델로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동맹 등의 항목을 내용으로 가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당연히 투키디데스의 &lt;&lt;펠로폰네소스 전쟁사&gt;&gt;에 대한 독서와 선이해(先理解)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커녕 서기전 몇 세기라는 시대에 대한 감각조차 없다. 춘추시대의 공자에 관한 문헌인 &lt;&lt;논어&gt;&gt;에 대한 이해에도 이러한 역사지식이 필수인데, 그게 없으니 도무지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국사와 세계사가 모든 이의 필수 과목도 아니며, 몇몇 똑똑한 아이들은 아예 제쳐두는 &#039;매니아 과목&#039;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에서 정운찬의 무지만을 탓할 수가 없다. 오늘날 중등 교육이 전문화라는 이름 아래 공동의 정신적 자산에 대한 교육을 모두 폐기하고 그것들을 소수 매니아들의 유희로 전락시킨 결과가 당연하게 뿜어나온 것이다.</p>
<p>3<br />
우리는 &#039;공교육(公敎育) 정상화&#039;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때 &#039;공교육&#039;은 무엇을 의미할까? 학교와 같은 공공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반대말은 사교육(私敎育)이다. 사교육은 흔히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집에서 홈스쿨링하는건 뭘까? 이건 개인교육일까? 그런데 의문나는게 있다. 학원을 사교육기관이라 하는데 과연 학원이 사적인 공간인가. 엄연히 국가의 허가를 받아 공공장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아닌가.</p>
<p>나는 공교육이라는 말을 공교육(共敎育)으로 이해한다. 학원은 특수한 곳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공교육에서는 우리 국민의 공통지식을 모두 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문과 이과 나눌거 없이 모든 과목을 모든 학생이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공통으로 배우고 수학 더 배우고 싶은 특수한 학생들은 수학 학원을 특별히 다니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의 학과에 따라 심화지식에 대한 요구가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들 나누어서 조금 더 가르치고, 적어도 2학년 2학기까지는 모든 학생이 공통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p>
<p>한국인의 다수는 대졸자가 아니다. 그러니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한 교육정책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할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이들 다수에게는 고등학교 교육이 인생의 마지막 공부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중등교육의 충실화이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통의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똑똑하다 자부하는 이들은 모두 교육문제는 대입제도라는 틀에서 논의를 벌이고 있다. 공통의 지식에서 생겨날 공동의 자산은 그들 사이에서 아주 무시되고 있다.</p>
<p>공교육은 공공기관에서 행해지는 교육이 아니라 공동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라져버렸고, 그에 따른 폐해는 실로 막심하다. 우선은 앞서 말했듯이 대학교육 자체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034;글로벌 인재 양성&#034;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 출신자들이 글로벌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전문 지식인이 될수록 더 심해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들이 공통으로 가진 지식이 없다는 데서 생겨난다. 한 국가의 정신은 물질문명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온 국민이 휴대폰을 쓰고 이메일을 사용한다해서 그들이 공동의 정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들이 공동정신을 가지려면 공동의 언어와 공동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소통의 출발점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공교육 종사자들은 &#039;공교육(共敎育) 정상화&#039;를 위해 나서야 한다.</p>
<p>&#03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034; 공화국(共和國)은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나라다. 공화주의의 이념은 바로 교육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교육통합은 사회통합의 시작이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공교육 정상화의 시작점이다. 이것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공교육 종사자라해도 사교육 업계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대 특정한 국가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과 기관의 목표는 바로 이것, &#039;객관적 공동정신의 형성&#039;에 있다.</p>
<p>4<br />
나는 도서관 역시 공교육 기관의 하나로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학교 교육은 어그러질대로 어그려져 있다. 책을 읽는 일은 아주 희귀한 몇몇 학생들의 취향이 된 지 오래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하면 공부는 물론이고 책읽기조차 특별한 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도서관은 지역에 관한 세밀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현 상황에 눈높이를 맞추면서도 그들을 객관적 공동정신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일은 도서관 사서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새겨두는 것이 절실하겠다.</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A%B0%95%EC%9C%A0%EC%9B%90%2C+%EA%B0%9D%EA%B4%80%EC%A0%81+%EA%B3%B5%EB%8F%99%EC%A0%95%EC%8B%A0%EC%9D%98+%ED%98%95%EC%84%B1%EA%B3%BC+%EB%8F%84%EC%84%9C%EA%B4%80%EC%9D%98+%EC%9E%84%EB%AC%B4,+http://allestelle.net/?p=1567"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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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본의 군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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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2 Nov 2009 01:35:06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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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요시다 유타카(지음), 최혜주(옮김), &#60;&#60;일본의 군대&#62;&#62;, 논형, 2005. [9788990618207]
1
&#034;&#039;천황의 군대&#039;에 관한 통사인 이 책의 저자는 &#034;한국은 전전의 일본과 같이 징병제를 채용하고 있고, 군대는 특히 젊은이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한국군의 건군과정에서 일본의 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조선인 장병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대와 한국의 군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034;면서 &#034;이 책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요시다 유타카(지음), 최혜주(옮김), &lt;&lt;일본의 군대&gt;&gt;, 논형, 2005. [9788990618207]</strong></p>
<p>1<br />
&#034;&#039;천황의 군대&#039;에 관한 통사인 이 책의 저자는 &#034;한국은 전전의 일본과 같이 징병제를 채용하고 있고, 군대는 특히 젊은이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한국군의 건군과정에서 일본의 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조선인 장병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대와 한국의 군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034;면서 &#034;이 책이 한국의 군대를 생각할 때 조금이라도 시사를 제공&#034;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 바람은 지나치게 소박한 듯하다. 일본의 군대와 군대 문화는 한국의 군대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이 책의 독서를 통해서 뚜렷하게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039;한국의 군대가 한국의 근대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039;라는 그리 새롭지 않은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목표라면 적은 노력으로도 적절한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굳이 한국의 군대와 일정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034;천황의 군대&#034;에 대한 책까지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김영미의 &lt;&lt;그들의 새마을 운동&gt;&gt;에서 제대 군인이 농촌 사회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내용을 보면서 근대화와 군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가 산업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의 구축과 그것에서 파생된 질서의식의 내재화, 그에 따른 전통 세계의 해체와 재구조화라는 생활세계의 차원으로까지 전개된 것이라면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에서 근대(또는 군대 경험)는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가 새삼 궁금해졌고,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유사한 과정을 5,60년 정도 앞서 겪은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는가를 보아야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를 수행한 핵심인물들이 &#039;천황의 군대&#039; 출신자의 부하였다는 사실도 이 책의 독서 동기 중의 하나였다.</p>
<p>먼저 &lt;&lt;그들의 새마을 운동&gt;&gt;<sup>1)</sup>에서 군대의 역할을 거론한 부분을 살펴보자. 1960년대부터 농촌 마을에는 &#034;청년 이장&#034;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우선 &#034;근대 교육의 이수자들&#034;이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기간 국가의 강력한 국민화 프로그램을 첫번째로 이수한 세대로서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자신감과 헌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헌신성 외에 그들의 군대 경험은 &#034;도시성과 근대성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였다.&#034; 이들은 농촌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군대 경험이 한국 근대화에서 일종의 긍정적 적극적 계기로 작용한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그러했는가? 일본 근대에서 군대는 그 이상이었다. &#034;일본의 근대적 생활양식은 군대에서 사회로 퍼져 나갔으며, 전전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기반은 바로 농촌의 중간층이었고, 이 계층을 강화시킨 것이 군대였다고 한다. 일본의 군대는 전쟁만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일본의 사회구조 전체를 지탱해 온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034;(옮긴이의 말)</p>
<p>전전의 일본 군대, 정확하게는 &#039;대일본제국육해군(大日本帝國陸海軍)&#039;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군대였다. 이는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에 의해, 그리고 그보다 앞서 1882년에 발포된 군인칙유(軍人勅諭)에 의해 확고하게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천황 이외의 어떠한 정부기관도 육해군에 관여할 수 없게 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034;육해군은 점차 정부나 의회에 의한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러일전쟁 이후에는 정치세력화한 독자적인 군부가 성립한다.&#034; 러일전쟁 이후 1945년 8월의 패전까지의 사태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군부가 주역을 맡게 되는데 이때까지 군인각료 비율이 36.8%였다.</p>
<p>전전 일본에서 군대는 &#034;민중의 내면적 지지&#034;를 받았다. 이는 천황의 군대로서의 일본 군대가 전전 일본에서 강고하게 형성된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상부구조의 토대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군대는 일본 민중와 천황을 이어주는 강력한 기제였다. 따라서 &#034;15년 전쟁기<sup>2)</sup> &#039;천황의 군대&#039; 존재상황에 따라&#034;, 즉 일본 군대의 형성과 절정기, &#034;지지의 급속한 붕괴&#034;<sup>3)</sup> 과정을 &#034;내재적으로 생각&#034;해보는 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절정기, 그리고 쇠퇴의 한 단면을 고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p>
<p>2<br />
근대화는 인간의 몸과 정신 모두에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 동안 인류가 누려온 삶의 방식 위에 구조화된 생활세계를 짧은 시간 안에 폭력적으로 개조하는 일은 평화롭게 진행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산업화의 척도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도시거주 인구 비율이 50%가 넘는가이다. &#039;선진&#039; 산업국가인 영국은 1850년대에 이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숱한 폭력이 사용되었음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1930년대에, 한국은 1960년대에 이 수준에 도달하였는데 이들 후발 산업국에서도 폭력성은 예외없이 드러난다. 그 폭력성은 이른바 &#039;위로부터의 근대화&#039;를 밀고나간 독재자들에 의해, 그리고 그 독재자의 의지를 구현한 특정 집단에 의해 유감없이 어김없이 주입되었거니와 1930년대 일본에서는 그 집단이 군대였고, 1960년대 한국에서는 &#039;천황의 군대&#039;에서 복무했던 이가 이끄는 군대였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화는 주도집단의 측면에서 굉장한 친연성이 있다.</p>
<p>후발 산업국에서의 군대의 역할은 저자도 명백히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군대와 사회의 관계에서는 &#034;군대 자체가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출을 위한 추진력이 되거나 군대의 형태가 거꾸로 사회의 형태를 규정해 간다고 하는 시점도 나타남을 알 수&#034; 있으며, 특히 이러한 사태는 &#034;후발형의 근대화를 달성한 국가에서&#8230; 보다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다.&#034;</p>
<p>그렇다면 군대에 의한 사회의 근대화는 주로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우선 &#034;시간.신체.언어&#034;에서의 급격한 변화로 나타난다. 군대생활은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서 영위된다. 오늘날에도 군에 입대한 신병들은 시간의 엄격함을 실감한다. &#039;오후 한시 반쯤&#039;이라고 말하던 이들은 &#039;십삼시 삼십분&#039;이라는 표현을 낯설어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034;시간적 규율화&#034;는 군대에서만이 아니라 공장, 학교<sup>4)</sup>에서도 훈련된다. 다시 말해서 &#034;군대는 공장.학교와 함께 인간을 근대적 시간질서에 맞추어 훈련시키는 중요한 장소&#034;였으며, 이는 &#039;생활의 시계화&#039;<sup>5)</sup>로까지 이어졌다.</p>
<p>근대화는 신체도 새롭게 만들 것을 요구한다. 신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정렬해서 걷는 훈련, 즉 제식훈련을 통한다. 지금도 군에 입대한 신병들이 처음 받는 훈련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제식훈련이다. 똑바로 앉기, 똑바로 서기, 똑바로 걷기 &#8212; 이 모든 것이 신체규율의 첫 단추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율화의 밑바탕에서는 &#039;언어의 표준화&#039;가 작동되고 있는데, 특히 군대에서 사용하는 &#039;군대어&#039;는 제대 장병들을 통해 일반 사회로까지 전파된다.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군대어의 사용은 전혀 낯설지 않으며, 특히 운동경기를 둘러싼 처절한 전쟁용어들은 별다른 비판없이 사용되고 심지어 운동선수들에 대한 비인격적 가학적인 훈련까지 정당화되기도 한다. 일본의 군대에서는 군대어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군대에서 &#039;군대어&#039;를 배워 익히는 것을 지렛대로 하여 공통 언어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034;전후의 일본어 중에도 특수한 &#039;군대 언어&#039;가 그대로 보통 일본어로 정착해버린 사례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예를들면 &#039;남은 음식&#039;(잔반, 殘飯), &#039;점검&#039;&#8230; &#039;처치할 수 없음&#039;, &#039;마구 독려하다&#039;, &#039;기합을 넣다&#039;&#8230; 등이 그것&#034;인데, 이는 현대 한국에서도 그 연원을 따지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것들이다.</p>
<p>군대가 사회의 근대화에 개입한 또다른 사례는 &#034;군대가 &#039;문명개화&#039;의 추진력이 되었다고 하는 점&#034;, 즉 물질문명의 변혁에서 수행한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대에 막 들어온 신병에게는 양복인 군복이 굉장한 문화충격이었으며 &#034;짚신을 신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의 민중은 입영해서 처음으로 군화를 배급받아 구두신는 법을 배웠다.&#034; 또한 군대에서의 식사, 특히 육식은 전통적으로 생선만 먹던 일본인들의 식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p>
<p>제대 장병들이 자신들의 향촌에서 벌인 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034;정부와 군이 병사 행정을 통해 지역사회의 조직화&#034;에 나선 것에서 비롯되는데 &#034;러일전쟁 이후 이러한 움직임은 한층 강해졌다.&#034; 이는 병영국가화를 위해 동원된 조직화가 군대는 물론 향촌까지도 세밀하게 뻗어있음을 보여준다.</p>
<p>3<br />
군대가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라는 존재 자체와 규율이 민중들에게 열렬한 환영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별다른 저항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군대가 민중의 삶에 이익을 가져야 주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군대라는 조직을 겪은 이에 대한 사회적인 대접이 남달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군대는 민중의 삶에 이익과 명예를 주어야 하며, 이것이 더이상 제공되지 않을 때 또는 삶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때, 즉 격렬한 전쟁이 벌어져 전 국민이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상황 등에서는 군대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철회될 것이다.</p>
<p>일본에서 &#034;징병검사는 &#039;한 사람의 남자&#039;로 간주되는 조건&#034;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039;군대갔다와야 어른된다&#039;는 속설이 통용되고 있다. 이는 징병검사나 병역이 &#039;인생의례&#039;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병역을 마친 사람들은 종래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근대적 질서를 체득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들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자연적 특권은 무시되고 계급만이 중요한 일종의 군대식 평등을 체험하게 된다. &#034;자신이 상관보다 부유하고 좋은 여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병사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군대는 복종과 평등성이 조합된 최초의 사회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034;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까지도 &#034;이러한 평등성이 군대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034;</p>
<p>군대는 사회적인 신분상승의 통로이기도 했다. 일반 병사들은 최상위에 있는 계급인 상등병으로의 진급을 열렬히 희망했다. &#034;마을의 청년들은 군대에 가게 되면 상등병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명예라고 생각하고&#8230; 그 상등병들이 재향군인이 되고 군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자가 되어 극히 간단한 국방론을 열심히 설득하게 된다.&#034; &#034;이러한 상등병으로의 강한 진급 희망이 생긴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이른바 &#039;훈장&#039;으로 지역사회 중에 커다란 위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034; 이러한 위신 외에도 군대 자체가 기술훈련 기관으로 인식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해군의 경우 &#034;이른바 어디에나 써먹을 수 있는 군대로서 오래 현역에 복무할 때는 그 복무한 만큼 더욱 고급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훗날의 입지를 정하는 데도 훨씬 좋은 편의를 얻을 수&#034;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군대는 체계적인 근대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고, 신분상승을 노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사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으며, 군부독재 시절만해도 많은 생도들이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고자 했었다. 오늘날에도 자기 지역 출신 &#039;장군&#039;이 배출되면 축하 현수막을 내거는 마을이 있기도 하다.</p>
<p>군대를 신분상승의 통로로서 간주하게 되면 군복무에 열심인 자들은 그만큼 &#039;충량한 병사&#039;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동시에 이들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담지자이자 전파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강화되는 계기인 &#034;러일전쟁 이후의 시기가 되면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계층이 지역의 민중 가운데 천황제 이데올로기 침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하게 된다.&#034;</p>
<p>군대가 여러가지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이익이 손해를 넘어서지 못하면 당연히 군대에 대한 충성도는 약해진다. &#034;군대와 민중 사이에 형성된 밀접한 관계는 15년 전쟁의 패전 시점에서는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034; 그리고 전쟁에 패했을 때 군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랭했다. 이 상황을 어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034;우리들 천황의 군대는 종전 후 무기없는 집단으로 고국에 돌아왔다&#8230; 우리들은 민족 자신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국의 땅을 밟아도 조국의 사람들과 마치 남 보듯이 대했다.&#034; 여기서 이 작가는 &#034;천황의 군대&#034;가 &#034;민족 자신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034;라고 말한다. 군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담지자이자 전파자였으므로 당연하게도 그것은 &#034;천황의 군대&#034;였으며, 러일전쟁 이후부터 이 군대는 민중과 괴리되는 길을 걸었다. &#039;군부&#039;라고 하는 군사관료기구가 자립적으로 성립되면서 이것이 온 나라를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p>
<p>4<br />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군부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립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라고 보고 있다. 이를 나타내는. 1차 지표들은 1907년 &#039;군령&#039;제정과 &#039;제국국방방침&#039;의 책정과 같은 제도적인 틀이다. &#034;군부의 성립을 나타내는 제2의 지표는 대략 이 시기에 전문적인 군사 관료층의 형성이 완성된 것을 틀 수 있다.&#034; 또한 &#034;러일전쟁 이후에는 독자적인 군사사상과 조직원리가 군내부에서 확립되었다.&#034; 이를 &#034;구체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합리성을 결한 정신주의, 경직된 공격 제일주의와 보병의 총검돌격만능론, 그리고 극단적인 전군 획일주의 등등이다.&#034; 우리가 일본 제국 군대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이 시기에 비로소 확고하게 정립되었다.<sup>6)</sup> 그러나 이 시기 일본군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039;천황의 군대&#039;라는 성격이 철저화되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는 전범령(典範令)의 성전화(聖典化)이다. 1907년 이후 일본 군대의 모든 군령은 천황의 재가를 필요로 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에따라 &#034;전범령 자체가 천황의 권위에 따라 절대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개정하려면 대부분의 경우 상주(上奏), 군사 참의관 회의에 대한 천황의 자문, 그 답을 받은 후의 천황의 재가라는 번거로운 수순을 밟아야&#034; 했다. 전범령의 성전화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면적으로 변해버린 전쟁양식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폐해를 낳아놓았다. 본래 일본 &#034;육군의 가상 적국은 일관되고 러시아.소련이고 전범령도 대러.대소전을 위한 교육과 훈련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034;<sup>7)</sup>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이 개시되기 이전에 전범령이 개정되어야 했으나 이는 1944년에야 지시가 내려질 정도였다. 시대는 총력전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일본 군대는 &#034;제1차 세계대전이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근본적인 자기혁신에 실패했다. 그러하한 모순은 일단 잠복되어 있었지만, 15년 전쟁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대량동원 시대에 분출되기에 이른다.&#034;</p>
<p>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034;일본의 군대가 초기 단계에서 근대화의 추진력이 되어 온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제도의 확충과 공업화의 진전, 더욱이 민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면서 군대가 가진 그러한 추진력은 점차로 쇠퇴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8230; 군대는 근대화의 질곡이 되어갔던 것이다.&#034; 이러한 통찰은 1970년대 한국에서의 고도 성장기에 나타난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한국은 황군 출신 독재자의 명령에 따른 군대식 조직화를 통해 경제 발전을 성취했으며, 그 유산은 군부 독재가 지속된 1980년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때의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은 2000년대인 지금까지도 사회 지도층으로 군림하며 폭압적 지배를 알삼고 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은 질적으로 풍요로운 미래를 설계하기는 커녕 오히려 20, 30년 전으로 회귀하는 희귀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결국 어떤 미래를 낳아놓을 것인가.</p>
<p>5<br />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034;&#039;쇼와의 육해군&#039;은 일본 사회가 낳은 이물(異物)도 귀신의 아들(부모를 닮지 않은 아들)도 아니며, 일본의 근대화가 만든 하나의 귀결&#034;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면서 일본은 미합중국 군정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평화헌법 체제로 전환하였다. 타력에 의해서이기는 하나 일본은 근대화가 낳아놓은 괴물 하나를 제거하였으며, 이제 관료제라고 하는 또다른 괴물을 제거하는 도정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웃 나라 한국은 2009년 현재 어떠한 상황에 있는가.</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C%9D%BC%EB%B3%B8%EC%9D%98+%EA%B5%B0%EB%8C%80,+http://allestelle.net/?p=1553"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ol class="footnotes"><li id="footnote_0_1553" class="footnote">이 책은 새마을 운동 역시 일제 식민지 시기의 &#039;농촌진흥운동&#039;과의 대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li><li id="footnote_1_1553" class="footnote">&#034;1931년 9월 펑텐(奉天) 교외의 류타오거우(柳條構) 부근에서 일으킨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1937), 아시아-태평양 전쟁(1941)을 거쳐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으킨 전쟁&#034;</li><li id="footnote_2_1553" class="footnote">겉으로는 열렬한 찬양을 내보이지만 그 지지자의 내면은 파탄에 이르러 있었고 이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다룬 &lt;&lt;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gt;&gt; [9788991136038]에 잘 나타나 있다.</li><li id="footnote_3_1553" class="footnote">근대의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학습하고 정해진 시간에 쉬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삼는다.</li><li id="footnote_4_1553" class="footnote">일본 군대의 전술변화에 따라 &#034;미리 명령받은 공격개시 시간에 공격을 개시하거나 적을 정찰하는 척후 등의 독립된 임무에 임하기 위해서도 시계는 병사에게 점차로 필수품이 되어갔을 것이다.&#034; &#034;세이코(精工舍, SEIKO)가 육해군 당국의 요청을 받고 육해군 병사가 사용하는 &#039;9형 손목시계 세이코 7석&#039;의 생산을 개시한 것은 1940년도의 일이었다.&#034;</li><li id="footnote_5_1553" class="footnote">이러한 특징을 사회에 적용하면 무조건 하면 된다는 식의 신념주의와 무모한 획일주의 등일 것이며, 이는 1970년대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던 황군 출신 지도자가 한국인들의 심성에 새겨준 것으로서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li><li id="footnote_6_1553" class="footnote">전범령이 러시아.소련을 겨냥하고 있었다해도 그 주력부대인 관동군이 실제로 전투에서 이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군대는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러시아 군대의 후신인 소련 군대를 대단한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군은 소련군에 의해 궤멸되었다.</li></ol>]]></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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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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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Oct 2009 05:30:11 +0000</pubDate>
		<dc:creator>강유원</dc:creator>
		
		<category><![CDATA[서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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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하영선 외(지음), &#60;&#60;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62;&#62;, 창비, 2009.[9788936413132]
1
이처럼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낸 책은 필자들의 실력을 한번에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욱이 10명의 필자 중 9명이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인 경우에는 일종의 개인차를 발견할 수도 있다.
2
&#039;문명&#039;, &#039;권력&#039;, &#039;주권&#039;, &#039;부국강병&#039;, &#039;세력균형&#039;, &#039;평화&#039;, &#039;국민/인종/민족&#039;, &#039;민주주의&#039; &#039;경제&#039;, &#039;개인&#039;, &#039;영웅&#039; &#8212; 마지막 영웅을 제외하면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하영선 외(지음), &lt;&lt;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gt;&gt;, 창비, 2009.[9788936413132]</strong></p>
<p>1<br />
이처럼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낸 책은 필자들의 실력을 한번에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욱이 10명의 필자 중 9명이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인 경우에는 일종의 개인차를 발견할 수도 있다.</p>
<p>2<br />
&#039;문명&#039;, &#039;권력&#039;, &#039;주권&#039;, &#039;부국강병&#039;, &#039;세력균형&#039;, &#039;평화&#039;, &#039;국민/인종/민족&#039;, &#039;민주주의&#039; &#039;경제&#039;, &#039;개인&#039;, &#039;영웅&#039; &#8212; 마지막 영웅을 제외하면 사회과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이다. 또한 이 개념들은 구한말을 전후하여 서구에서 도입되었고 일정한 변형을 거친 것들이다. 우리는 각각의 개념들이 도입되고 변형된 맥락과 그 내용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서구 개념의 형성, 도입과정, 도입된 이후의 수용과 변형과정, 그리고 현재의 용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정과 내용을 알아야만 하는가? 현실적인 쓸모는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개념들이 서구에서 &#039;본래&#039; 어떤 뜻이었건, 또 도입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했건, 이제 어느 정도 토착화되었으며, 그것에 어느 정도 합의하고 있으면 그만아닌가. 이 책도 이 물음에 대해서는 대단히 설득력있는 대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039;책머리에&#039;의 &#034;개념사 연구가 이렇게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면 한국의 사회과학은 영원히 사상누각의 위태로움을 벗어나기 어렵다&#034;는 말은 추상적이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다. 하영선의 &#039;변화하는 세계와 개념사&#039;에 나오는 &#034;무대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었던 근대한국은 기본 개념의 강대국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개념으로 변화를 재단하고 비현실적 미래를 꿈꾸는 비극을 맞이했다&#034;는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뜬금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최소한 비극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개념사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034;개념화의 21세기적 식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21세기의 변화를 어설프게 개념화하고 미래를 꾸려 나가려고 하면, 우리는 19세기적 21세기 난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첫걸음은 본격적인 한국의 개념사 연구&#034;라 하겠다.</p>
<p>3<br />
개념사 연구 &#8212; 그냥 평이하게는 개념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난관 회피의 첫걸음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겠는데 우리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039;정치&#039;를 한번 생각해봄으로써 그 의의를 우선 짐작해보기로 하자.</p>
<p>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정치는 도덕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을 거론할 때 전거로서 빈번하게 인용되는 &lt;&lt;논어&gt;&gt; 안연(顔淵)편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034;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였다. 정치는 올바름이다. 당신이 올바름으로써 이끌면 감히 누가 올바르지 않겠는가(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 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034;<sup>1)</sup> 공자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형성된 도덕주의 정치관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조선의 전통을 무의식중에 체화하고 있는 한국의 인민들은 도덕적 올바름이 함축된 정치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국가로서의 한국은 이러한 정치개념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근대국가에 있어 정치개념을 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는 &#034;한 정치적 조직체 내에서의 권력 배분 또는 여러 정치적 조직체들간의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행위&#034;(&lt;&lt;직업으로서의 정치&gt;&gt;)이다. 이러한 개념에 걸맞게 행위하는 근대 국가의 정치가는 법에 합당한 수단을 통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는 이외의 것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처럼 &#034;권력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행위&#034;를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하곤 한다. 이러한 일종의 이중 잣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정치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대통령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이다. 베버에 따르면 &#034;근대 국가는 공적 법인체의 성격을 띤 지배 조직&#034;으로서 &#034;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데 성공한 지배조직&#034;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 국가의 최고 운영자로서 대통령은 법에 합당한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해관계를 철저하게 충족시키려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정치가는 종교가도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그의 과업은 인간 영혼의 구원에 있지 않다. 모든 정치적 행위에는 &#034;악마적 힘&#034;들이 개입되어 있고 정치의 과업은 &#034;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034; 있다. 그러므로 근대 국가로서의 한국에서 도덕주의적 정치를 펴려하는 지도자는 사실상 무능한 지도자인 것이다.</p>
<p>&#034;악마적 힘&#034;들과 관계하는 근대 국가 정치가의 본성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지 못한채 이러한 착각이 계속된다면 착하고 도덕적인 인민들의 수난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 도덕주의적 지도자들의 어설픈 노고는 번번히 좌절될 것이거니와, 이는 결국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공멸의 지경으로 모두를 이끌고 갈 것이다. </p>
<p>4<br />
개념사 연구를 말한다면 반드시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을 떠올려야 한다.<sup>2)</sup>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 &#034;개념사 연구는 단순한 개념의 역사적 지속과 변화를 다루지 않는다.&#034; 다시 말해서 개념 그 자체를 고정된 상태에 두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034;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전망 속에서 현재를 개념화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034;로서의 인간을 중심으로 개념 형성의 전반적 맥락을 따져 묻는다. 이때 개념사 연구는 사회사 연구와 긴밀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거니와, 이러한 상호연관을 코젤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034;사회사 학술용어는 언어로 축적되는 경험을 접근할 수 있게 하려면 개념사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개념사는 결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사라져버린 현실과 언어적 증거의 차이를 계속 보려면 사회사 결과에 의존해야 한다.&#034;</p>
<p>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들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를 수행하려면 코젤렉의 방식에 따라 &#034;개념의 변화를 특정 사회 내부의 구조적 변화와 관련하에서 추적&#034;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들은 내부에서 생겨나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일단 외부에서 도입된 것들이므로 &#034;서구라는 외부적 충격과 서구 문명 전파에 대한 대응의 형태로서&#8230; 수용과 변화과정에 촛점&#034;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독일에서 생겨난 개념사 연구 방법 자체도 한국에서는 수용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에따라 필자들은 &#034;개념형성사를 근대 서양 개념 도입사로 접근하려던 소박한 생각&#034;을 접고 &#034;전통 개념의 좌절사를 거쳐 전통과 근대개념의 복합으로 형성되는 새 개념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034;를 풀어야만 했거니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러한 숙제에 대한 답이라 하겠으며, 우리도 이 글들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제시된 개념들의 형성과정에 주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들이 이 숙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도 유념하는 것이 좋겠다. </p>
<p>5<br />
새로운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수용과 변형 또는 외부의 충격과 그에 따른 내부의 대응일 것이나 거기에는 더욱 복잡한 사정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개념은 그 개념을 도입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없다면 도입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로 우리는 &#039;주권&#039;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를 전개했던 조선은 외부 국가와 근대적 의미의 &#039;조약&#039;을 체결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병자년인 1876년 일본과 맺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를 통해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관계가 형성되었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의 제1조는 &#034;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朝鮮國 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034;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자주는 조선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개념이며, 일본이 이 개념을 삽입한 의도는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宗主權)을 배격하려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034;조선에 주권 개념의 도입과 사용은 청을 중심으로 한 사대와 조공의 전통 질서에서 조약과 국제법의 서구 근대 질서로의 이전을 의미하였고 이는 &#039;세계관 충돌&#039;의 형태&#034;를 띠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외 관계의 규범과 규칙의 전파, 더 나아가 현실적 무력 충돌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1894년에서 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은 &#034;상국(上國)의 체면상 속방(屬邦)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034;는 명분<sup>3)</sup> 아래 파병하였고, 일본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회답을 보내면서 군사를 출병시켰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서 청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의례 철폐를 선언하였는데, 이로써 청.일.조선 동아시아 삼국은 형식적으로 근대적 국가관계에 들어섰다.</p>
<p>이 과정에서 우선 시선을 끄는 것은 조선에 &#039;자주&#039;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이 대외관계를 규정할 때 사용했던 개념은 사대교린이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이러한 기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039;직면&#039;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현실이 침입해 들어왔다고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조선은 대외 전략을 세우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여전히 사대교린의 방책에 얽매인채 사대의 대상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말 외교현장에서 발견하는 친청, 천러, 친미, 친일의 군상들은 매국의 신념에 복무한 이들이 아닌 사대의 전략을 충실히 따른 이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개념이 그러하고 그 개념에 충실했으니 그들의 행위와 그 결과를 비난할 수만도 없다. 개념없는 자들은 어떤 짓을 하는지만 잘 알아두면 되겠다.</p>
<p>6<br />
구한말 이래 한반도의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외교적 안목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앞서 &#039;자주&#039;, &#039;주권&#039; 개념을 살펴보면서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그런데 근대 &#034;서구의 외교란 국력의 일부이자 이를 바탕으로 한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말하자면 서구의 외교란 단순히 친선과 교린의 차원을 넘어 전략적 구상과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전략적 행위의 총체였고, 따라서 전문적 행위와 연구영역이었다.&#034; 외교가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된 권력국가가 정치행위의 주체인 시대이다. 외교는 물론 법 역시 이러한 전문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 &#034;서구의 법은&#8230; 국가 권력의 작동원리와 나아가서 국민의 삶의 모든 부분을 규정하는 강제규범이었고, 따라서 국가는 이제 인(仁)과 덕(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군자(君子)의 도(道)의 발현이 아니라 일정한 규범을 기준으로 하여 강제력을 발동하는 제도가 되었다.&#034;</p>
<p>서구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논의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동아시아적 정치, 법의 개념이 옳다해도 동아시아 국가들은 그것을 타국에 대해서는 물론 자국 안에서도 자주적으로 관철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현실과 그에 걸맞는 개념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의 소수 선각 지식계층이 있기는 하였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 서적 등과 같은 인쇄매체를 통해 개념을 전파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034;정부의 정책입안이나 법령 공포 그리고 교육과정에서 학교 교과서의 배포 또는 대중 강연회, 대중집회, 학회의 개최&#034; 등을 통해 더욱 진전된 전파를 시도하였다. 그러한 당시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박영효와 유길준의 글들을 분석해보면 &#034;서구사상의 언어와 전통사상의 언어가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혼합된 채로 교차적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개화파의 독자적인 사고체계, 말하자면 동서양의 사상이 소화된 단일한 사고체계는 나타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034; 그것의 원리가 전통에서 길어올린 것이건 새롭게 받아들인 서구 사상이건 개화파의 사고체계가 &#034;소화&#034;된 무엇인가를 낳아놓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p>
<p>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어떠했을까? 다시 말해서 같은 개념이라해도 그것이 수용되는 장소(topos)에 따라 수용과 변용의 차이는 어떤 정도로 일어날까? 여기서 우리는 장인성이 분석한 &#039;세력균형&#039;의 개념을 예로 들어 이 상황을 검토하기로 하자. 그에 따르면 &#034;19세기 유럽의 &#039;세력균형&#039; 개념은 권력을 지배력, 영향력, 강제력 등으로 파악하고 도덕과 권력을 분리하여 권력 자체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034;<sup>4)</sup>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세력균형(또는 &#039;균세(均勢)&#039;) 개념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무사들에게는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되어 &#034;개체적 전투력과 생존의지에 충만한 만국투쟁적 질서&#034;로 이해되었으며, 그에따라 &#034;부국강병을 통해 주권을 확보하고 서양국가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개체적 주체적 생존의지&#034;로 귀결되었다. 청에서는 세력균형이라는 말에서 &#039;균형&#039;이 강조되어 이해되었다. 청은 &#034;서양국가(미국)를 끌어들여 러.일을 견제하는 동북아 세력균형 &#8212; &#039;균세지국(均勢之局)&#039; &#8212; 을 구상하는데, &#039;이이제이(以夷制夷)&#039;를 동원&#034;하였거니와,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청이 여전히 &#039;화이질서적 대국관(華夷秩序的 大國觀)&#039;을 가지고 사태에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른 한편 조선에서 이 개념은 &#034;대국과의 동맹이나 외교정책의 신중함(prudence)을 추구하는 전략관념&#034;으로 이해되었다. </p>
<p>우리는 세력균형이 본래 서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아시아 국가 각각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도 알아야만 한다. 근대의 세력균형 개념은 동아시아에서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용이 일어나게 되지만 그 변용은 장소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수용.변용과정을 분석하려면 우리는 먼저 &#039;관념(idea)&#039;과 &#039;개념(concept)&#039;을 구별해야 한다. &#039;관념&#039;은 &#034;개념을 생성하는, 혹은 그것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주관적인 생각들&#034;이고, &#039;개념&#039;은 &#034;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확립된, 혹은 널리 양해되는 언어로 표현된 표상&#8230; 사물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객관화된 언어 혹은 논리적 실재&#034;이다. 이 구별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세력균형 개념의 수용과 변용에서 알아보자. 서구 근대의 세력균형 개념은, 서구에서는 멀게는 30년전쟁 이후 국제질서를 틀지운 베스트팔렌조약 이래 형성된 서구인들의 관념 위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중세의 신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에따라 국제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국민국가 체제는 낯선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무렵 그들은 300년 정도에 걸친 &#039;근대화&#039;를 마무리짓고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섰다. </p>
<p>앞서 말했듯이 일본에서는 세력균형이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되어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이 체제는 바로 일본이 가지고 있던 관념에 해당하거니와, 이는 일본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일본인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주관적 생각이었다. 반면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청과 조선에서는 그것에 근접한 관념들로써 서구의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034;수용된 개념은 관념에 의해 변용되며, 관념은 변용된 개념을 형성한다&#034;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이 관념은 피수용자의 역사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니, 이 경험의 유무가 정확한 개념 수용의 핵심적 요인이라 하겠다.</p>
<p>이 점은 &#039;민족/국민&#039;, &#039;경제&#039; 등의 개념수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민족 개념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강력한 힘을 얻게 된 것인데, 이것 역시 역사적 맥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039;민족&#039;으로도 번역하는 nation은 본래 &#039;근대국가의 인민, 즉 국민&#039;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039;피를 나눈 동포&#039;의 뜻은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개념이 도입된 대한제국 시기에는 &#039;국민&#039;으로만 이해되었으나 &#034;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국민의 전제가 되는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전의 국민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민개념에 의거하던] 논자 다수는 [일본]제국에 의해 점령된 국민개념과의 결별을 꾀했다.<sup>5)</sup> 국민개념을 버린 논자들이 다시 주목한 것이 다름아닌 민족개념이었다&#8230; 국민개념의 제국주의 논리로의 변화가 민족개념으로의 급속한 집중으로 이어지는 상황&#034;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039;nation building&#039;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039;국민(국가) 형성&#039;이 아닌 &#039;민족 형성&#039;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p>
<p>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다른 주요 개념은 &#039;경제&#039;이다. 이 개념은 서구에서도 전면적인 변화를 거쳤다. economy라는 말을 &#039;가정&#039;을 가리키는 희랍어 oikos와 &#039;규범&#039;을 가리키는 nomis가 결합된 것으로서 &#039;집안일 관리&#039;를 의미하였다. 그것이 &#039;부. 성공&#039;을 의미하고 국가의 관리를 받는 것, 재산, 교환과 분업의 체계를 의미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 과정에는 서구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의 심대한 변화가 수반되었다. 다시 말해서 서구에서도 경제는 본래 사회의 일부였으며, 그것이 근대 이후에야 별개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질서의 원천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 시대에 &#034;국가가 국민경제를 구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명확한 국경 안에서 살림살이한다는 의미 혹은 그 안에서 경제 행위를 규율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명시적이고 의식적으로 부의 추구를 국가 주요 정책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근대국가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부국강병의 차원에서 경제를 매개로 근대국가를 이룬다&#034;는 뜻으로 이해된다. </p>
<p>사농공상의 질서가 상존했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경제를, 그 번역어가 의미하듯이 &#039;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경세제민(經世濟民)&#039;는, 일종의 정치윤리와 통치술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를 부의 체계적 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034;정치.경제, 즉 새로운 경제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제도적 기반을 요구하는 일의 성격을 띠게 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수반되는 정치적 과정&#034;이었다.<sup>6)</sup> 21세기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039;경제&#039;를 &#039;돈벌이&#039;의 의미로 이해한다. 가령 &#039;경제 대통령&#039;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물어보면 &#039;돈많이 벌게 해주는 대통령&#039;이라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개념이 변용된 것 역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개입된 귀결일 것이다.</p>
<p>개념은 관념을 정리해주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들어낸다. 물론 개념이 없다해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건 아니나 어설프게 변용된 개념은 차라리 가지고 있지 않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이르렀고 다른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된다해도 그것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개념이해자의 정치적 처지나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러한 이해와는 아주 무관한 언설이 펼쳐질 수도 있다.<sup>7)</sup> 개념이해와 삶의 영위는 다른 문제이다.</p>
<p>7<br />
이 책에 실린 &#034;근대한국의 문명개념 도입사&#034;에서 필자는 유길준(1856-1914)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조선이 겪고 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2)청일전쟁 이후 급격하게 커진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3)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4)조선형 문명화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필자는 21세기가 &#034;탈근대 복합국가들의 부국강병을 넘어선 복합목표를 새롭게 추구하는 신문명의 가능성을 맞이&#034;하고 있다면서 &#034;한반도는&#8230; 21세기 한반도형 문명화의 꿈을 새롭게 꾸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034;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19세기 말의 실패를 거울삼아 21세기에는 뭔가 잘해보자는 말인듯한데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21세기를 어떤 문명 &#8212; 같은 뜻은 아니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도 해보자 &#8212; 모형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제프 일리의 &lt;&lt;The Left&gt;&gt;<sup>8)</sup> 서문의 두 문장을 떠올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034;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034;</p>
<p align="left"><a class="tt" href="http://twitter.com/home/?status=[allestelle.net]+%EA%B7%BC%EB%8C%80%ED%95%9C%EA%B5%AD%EC%9D%98+%EC%82%AC%ED%9A%8C%EA%B3%BC%ED%95%99+%EA%B0%9C%EB%85%90+%ED%98%95%EC%84%B1%EC%82%AC,+http://allestelle.net/?p=1542" title="Post to Twitter"><img class="nothumb" src="http://allestelle.net/wp-content/plugins/tweet-this/icons/tt-twitter-micro3.png" alt="Post to Twitter" /></a></p><ol class="footnotes"><li id="footnote_0_1542" class="footnote">이 구절은 자로(子路)편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면 더 명료해진다: &#034;공자가 말하였다. 그 몸을 올바르게 하면 정치를 함에 어찌 어려움이 있겠는가. 내 몸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034;</li><li id="footnote_1_1542" class="footnote">이 연구성과는 Otto Brunner, Werner Conze 등과 함께 내놓은 <em>Geschichtliche Grundbegriff: Historisches Lexicon zur politische-sozialer Sprache in Deutschland</em>에 담겨 있다.</li><li id="footnote_2_1542" class="footnote">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통해 근대 국제법적으로는 동등한 자주국가의 위치에 있었는데, 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을 여전히 조공국(朝貢國)으로 보고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오카모토 다카시, &lt;&lt;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gt;&gt;을 참조하라.</li><li id="footnote_3_1542" class="footnote">이렇게 보면 이 개념 역시 우리가 이 글 서두에서 막스 베버를 참조하면서 언급했던 근대적 의미의 &#039;정치&#039;와 &#039;국가&#039;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li><li id="footnote_4_1542" class="footnote">이 시기는 일본제국에 의해 &#039;황국신민(皇國臣民)&#039;이라는 개념이 주입되는 때이기도 했다.</li><li id="footnote_5_1542" class="footnote">조선시대 말 &#039;경제&#039;의 도입, 일제 식민지 시기의 전개 등에 관해서는 이승렬, &lt;&lt;제국과 상인: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gt;&gt;을 참조할 수 있다.</li><li id="footnote_6_1542" class="footnote">이 책에서 &#039;책머리에&#039;, &#039;변화하는 세계와 개념사&#039;, &#039;근대한국의 문명개념 도입사&#039;, 이렇게 세 항목을 쓴 하영선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들은 그의 개념사적 통찰보다는 &#039;세상을 개념있게 사는 태도&#039;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li><li id="footnote_7_1542" class="footnote">이 책의 원제는 &#039;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039;이다.</li></ol>]]></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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